“법관 독립침해 온몸으로 막겠다” 취임사와 달리
여권의 법관 공격엔 더디고, 원론적 입장만 밝혀
정원수 사회부장
“100명의 시위를 허가해도 취소된 다른 시위와 합쳐질 것이라는 상식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계적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내세운 무능은… 왜 그들의 잘못은 어느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가.”
광복절 당일 동화면세점 앞에서의 집회 2건을 허가한 서울행정법원 A 부장판사에 대한 해임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의 일부다. A 부장판사는 집회 전날 결정문을 통해 “8월 1, 7일 서울에서 2000명과 1만 명 규모의 집회가 각각 개최됐고, 각 집회로 인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되었다는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등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제일교회 교인 등을 포함한 광화문 집회발 감염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청원에는 34만 명 이상이 동의했다. A 부장판사뿐만 아니라 올 4월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담임목사의 조건부 보석을 허가한 서울중앙지법 B 부장판사의 프로필 등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두 부장판사는 요즘 동료 법관들의 위로 전화를 자주 받는다고 한다.
2017년 8월 청와대 국민청원이 생긴 이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나 정치인, 기업인 등에 대해 판결한 법관 10명 이상이 해임 대상으로 거론됐다. 2018년 2월 청와대는 “사법권은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권력이다. 청와대가 해결사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답변했지만 해임 요구 청원은 그 뒤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여권에서도 법관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결과적으로 적절치 않은 결정이었고,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라고 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사법당국이 책상에 앉아서만 그럴 게 아니라 국민과 협조할 땐 해야 하지 않느냐.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한 여당 의원은 감염병예방법상 집회 제한이 내려진 지역의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해당 판사의 이름을 붙여 발의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첫 제동을 건 것은 변호사 단체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달 31일 성명을 통해 “법원의 집회 허가 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법관 개인에 대한 공격과 비난이 지속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소신을 지키기 어렵다”면서 “여론에 영합한 판단을 내리게 될 위험도 있다”고 밝혔다. 입장문을 공개해야 한다는 일부 회원들과 지방변호사단체의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법관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침묵을 아쉬워하고 있다. 한 법관은 “법관의 독립 침해를 보호하는 것이 곧 사법부 독립 아니냐”고 했다. 법관이 린치를 당하고 있는데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할 대법원장이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판사 개인이 곧바로 여론에 노출되면 법관이 재판을 할 때 여론을 의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사법부의 위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대법원장으로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 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권의 법관 개인에 대한 공격에 김 대법원장은 아예 침묵하거나 한 박자 늦게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2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 재판장에 대한 여권의 공격이 거세졌을 때 김 대법원장은 “개개 법관의 공격으로 나아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판결 내용이나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허용돼야 한다”는 취지로도 말해 법관들로부터 너무 원론적인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5일 임기 절반인 3년을 넘기게 되는 김 대법원장이 사법권 독립에 대한 단호한 메시지를 내놓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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