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키운 ‘괴물 기후’[오늘과 내일/이성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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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잦아지고 강해지는 기상이변… 행동 없는 논쟁만으로 해결 못해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추워야 겨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는 정말 추웠다.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던 때다. 아직 12월 초순이었던 9일 서울 지역 수은주는 영하 13.2도를 찍었다. 이날 강원 철원의 기온은 영하 21.7도까지 곤두박질쳤다. 해가 바뀌자 더 추워졌다.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안팎인 날이 11일 동안 이어졌다. 영하 29.5도(강원 용평)를 보인 곳도 있었다. 2월 어느 날에는 서울 기온이 영하 15.8도까지 떨어졌다. ‘모스크바보다 추운 서울’은 농담이 아닌 현실이었다. 의류 매장마다 기능성 내복을 사기 위한 줄이 길게 이어졌다. 2010년 말부터 나타난 겨울 한파는 그렇게 세 차례 이어진 뒤 수그러들었다.

당시 한파의 가장 큰 원인은 북극이다. 북극 지역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찬 공기를 가두는 제트기류의 힘이 약해졌다. 원형을 유지해야 할 기류는 마치 리듬체조 선수의 리본처럼 춤을 췄다. 중위도 지역까지 처진 기류 탓에 북극의 찬 공기가 여러 나라에 추위를 몰고 왔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기류 탓에 비슷한 위도여도 나라마다 날씨가 달랐다. 북반구 겨울 날씨는 복불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후변화 정책에 반대하는 학자나 정치인은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추운데, 지구 온난화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음모론이 퍼졌다. ‘권력 이동’을 꿈꾸는 일부 글로벌 기업과 자본가, 선진국 정치인이 결탁한 결과가 기후변화라는 것이다. 결론 없는 논쟁 속에 그해 한파는 잊혀졌다.

올해 한반도는 전례 없는 여름을 나고 있다. 11일로 올 장마는 역대 최장기(49일·2013년)와 같은 기록을 썼다. 공교롭게 원인을 제공한 건 바로 북극이다. 10년 전 3년 연속 한파 때와 같다. 달라진 건 겨울이 아닌 여름에, 그리고 추위가 아닌 물폭탄이 내린 것이다. 그 대신 한반도 여름 날씨를 쥐락펴락하는 북태평양고기압은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북극 찬 바람에 밀려 좀처럼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가 두 세력의 전장(戰場)이 되면서 엉뚱하게 장마전선이 오도 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비를 내리고 있다. 치열한 ‘남북 대치’는 이때만이 아니다. 2018년 여름에 닥친 사상 최악의 폭염은 올해와 정반대 상황 탓이었다. 그해 여름 북태평양고기압은 전례 없이 폭발적으로 세력을 키웠다. 또 북극의 찬 공기는 제트기류의 봉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지구 온난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상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따뜻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에 머물지 않는다. 갈수록 예측불허의 이변을 만들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이례적 10월 태풍도 마찬가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의 원인을 기후변화에서 찾는 전문가가 많다. 달라진 기후가 동식물 생태계를 바꿔놓은 탓에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을 불러왔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당장 코로나19까지 의심할 필요도 없다. 뎅기열을 유발하는 흰줄숲모기는 이미 국내 도심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열대지방에 사는 이집트숲모기는 20여 년 뒤 한반도에 뿌리 내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겨울 대부분 춥지 않은 날씨가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올여름 곳곳에 대벌레 매미나방 같은 벌레 발생이 늘어난 건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환경부가 펴낸 기후변화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한반도 기온 상승 폭은 지구 전체 평균의 2배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그러나 7년 전 한파, 2년 전 폭염의 교훈을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한파와 폭염 그리고 이번 장마까지, 범인은 같다. 논쟁을 시작하는 건 늦었다. 행동하지 않고 쉽게 잊으면 또 다른 괴물이 찾아올 것이다.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starsky@donga.com
#망각#괴물#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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