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한 디즈니의 선택[오늘과 내일/서정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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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관계 픽사 인수로 명가 재건… 미래를 위한 화해 방법 배우자

서정보 문화부장
서정보 문화부장
올 2월 디즈니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 로버트 아이거의 자서전 ‘The Ride of a Lifetime’(미국에선 지난해 출간됐고, 국내에는 ‘디즈니만이 하는 것’이란 제목으로 올 5월 출간됐다)을 보다가 인상적인 대목이 눈에 띄었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는 말처럼 신생 회사를 키우는 것보다는 쇠락해가던 회사를 맡아 다시 전성기를 찾는 게 훨씬 어렵다. 아이거는 재임 15년 동안 ‘그 어려운 걸 해낸’ CEO였다.

그는 2005년 CEO가 된 뒤 픽사(2006년) 마블코믹스(2009년) 루커스필름(2012년) 21세기폭스(2018년)를 인수하며 ‘디즈니 은하계’를 만들었다. 돈이 많으니까 기업 쇼핑을 한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합병할 때마다 아이거는 깐깐한 이사회를 상대로 합병의 타당성과 수익성을 설득해야 했다. 더 어려운 건 인수하려는 회사의 고집 센 CEO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픽사의 스티브 잡스나 마블코믹스의 아이크 펄머터, 루커스필름의 조지 루커스는 하나같이 자신들의 콘텐츠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었다.

첫 단추를 끼우는 게 어렵다고 픽사의 인수는 험난하기만 했다. 잡스가 이끌던 픽사는 창업 당시 디즈니와 5편의 애니메이션 공동제작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토이스토리(1995년), 벅스라이프(1998년), 몬스터주식회사(2001년)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흥행수입만 10억 달러가 넘는 대박을 쳤다. 그런데 토이스토리2를 제작할 때부터 둘의 갈등이 심각해졌다. 픽사는 애초 계약한 5편의 작품에 토이스토리2가 포함된다고 했고, 디즈니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맞선 것.

2004년 잡스는 “다시는 디즈니와 거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당시 디즈니 CEO였던 마이클 아이스너는 “별것 아니다”라고 응수하면서 최악의 관계에 빠졌다.

이렇게 원수처럼 싸우게 된 두 기업이 합병의 결실을 맺게 된 과정을 짧게 간추려 보자. 취임 직후 아이거는 잡스에게 직접 연락해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부터 시작했다. 당시 애플의 신제품(동영상 재생 가능한 아이팟)에 디즈니 콘텐츠를 제공했다. 이어 픽사의 본질과 문화, 창의성을 존중해준다고 약속하며 잡스뿐 아니라 픽사의 주요 임원을 두루 만나 신뢰를 쌓았다. 또 ‘말도 안 되는 거래’, ‘잡스와는 협상이 안 될 것’이라는 내부의 비관론도 잠재웠다.

그 결과 74억 달러에 인수된 픽사는 이후 라따뚜이, 월E, 업, 인사이드아웃, 메리다와 마법의 숲, 코코 등을 만들었고 이들 작품은 모두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다.

아이거의 책은 주로 리더십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미래를 위해 갈등하는 상대방과 화해하는, 혹은 협력하는 법이었다. 미래 가치(몰락하던 디즈니애니메이션 브랜드의 부활)를 위해 최악의 갈등 관계에 있던 잡스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요구조건을 미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수용하고 작품 제작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최고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것이 아이거가 이룬 모든 성공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아이거의 방법은 개인 회사 사회 국가 차원 등 모든 면에서 적용할 수 있다. ‘미래의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가 갈등 해결의 출발점이다.

그는 CEO가 되기 위한 이사회 면접에서 이렇게 어필했다.

“문제는 미래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적용하는 것입니다.”

서정보 문화부장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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