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의 美 ‘바링주의’ 비판… 미중 갈등 한복판 선 한국[광화문에서/윤완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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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4일 한국에 도착해 첫 일정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바링(覇凌) 행위’란 말을 꺼냈다. “세계 평화 안정이 직면한 최대 위협은 바로 바링 행위가 국제관계 준칙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한국을 떠난 5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서도 “슈퍼 대국이 걸핏하면 바링 행위를 해서 세계의 ‘트러블메이커’가 됐다”고 비판했다.

‘바링’은 본래 학교에서 약한 학생을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걸 뜻하는 중국어다. 중국 정부는 올해 미국만을 겨냥해 ‘바링주의’ ‘바링 행위’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사용 빈도가 부쩍 많아지면서 중국에서 바링주의는 미국을 비판하는 유행어가 됐다. 2일 중국 잡지 야오원자오쯔(咬文嚼字)가 선정한 중국의 올해 10대 유행어에 ‘바링주의’가 선정되기도 했다.

왕 위원이 쓴 ‘바링 행위’를 일부에서 ‘패권주의’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바링주의는 중국이 미국의 중국 ‘괴롭힘’을 비난하기 위해 고안해 낸 용어라는 점에서 패권주의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왕 위원이 미국만을 겨냥한 이 ‘바링’ 용어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온 첫날부터 떠날 때까지 쓰며 미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분명 이례적이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 중국은 이웃이자 친구이고 동반자”라고 강조하며 함께 미국의 ‘바링 행위’에 맞서자고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 접견부터 각계각층이 참석한 오찬 행사에서까지 미국을 직설적으로 비난한 왕 위원의 화려한 방한은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지난해 이후 중국은 올해부터 부쩍 주변국들과 관계 개선을 시작했다. 중국 당국은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 정부 측 당국자들을 만날 때마다 미중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에서 미국 편을 들지 말고 중국 편에 서달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내 왔다. 중국은 한국이 방위비 분담 문제, 한일관계 갈등, 대북정책 등에서 미국과 관계가 삐걱거리는 상황을 포착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희망해 왔다. 중국은 왕 위원의 메시지를 통해 시 주석의 방한이 성사되려면 한국의 일대일로 참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해결은 물론 미중 갈등 이슈에서 한국이 좀 더 중국에 기울어져야 한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미중 갈등은 무역, 안보를 넘어서 더 근본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홍콩과 신장위구르 문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 간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이 얼마나 첨예한지 보여준다. 왕 위원은 미국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며 “중국을 억제하려는 배후에 이데올로기의 편견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2월 중국 국제정치학계의 대표적 석학 옌쉐퉁(閻學通) 칭화(淸華)대 국제관계연구원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경쟁이 이데올로기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도록 통제해야 신(新)냉전을 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중 갈등이 이데올로기 냉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국 정부는 한국을 끌어당기려는 중국과, 이를 경계하는 미국 사이에 놓였다. 내년은 미중 갈등 격화의 세계사적 국면을 헤쳐 가는 한국 정부의 지혜가 시험대에 오르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미중#무역갈등#바링 행위#이데올로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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