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파기후 한미관계 물밑협의로 갈등 해결 필요[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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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작은 비밀을 하나 말해 드릴까요?”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으로 워싱턴이 시끄럽던 지난주 트럼프 행정부의 한 관계자와 커피를 마실 때였다. 예상보다 거친 반응을 보이는 미국 정부의 분위기와 움직임 등을 물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이렇게 말하며 얼굴을 불쑥 앞으로 들이밀었다.

뭔가 남들이 모르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려나 싶어서 살짝 긴장하는 사이 그는 “우리가 앞으로는 ‘문 정부(Moon administration)’라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될 것”이라며 “그 부분을 잘 지켜보라”고 했다. 국무부와 국방부 등 관계 부처로부터 이미 ‘문 정부’가 들어간 논평을 받은 이후였는데도 마치 대단한 정보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 이후 깊은 우려와 실망을 잇달아 표출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미국의 날 선 반응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기자에게 ‘한국 전체를 대상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이날 한국이 미국에 얼마나 중요한 동맹인지, 얼마나 긴밀히 소통하고 있는지를 재차 강조했다. 아마도 지소미아 파기라는 특정 결정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언급은 ‘앞으로 더 강한 반응을 내놓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도 들렸다.

다른 부처의 미 당국자와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미국 반응의 대상이 ‘문 정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보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그러면서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한국 국내 정치적 논란과 이에 대한 젊은층의 반응도 물었다.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국내 상황을 민감하게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은 한일 관계를 관망하던 워싱턴의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았다. 미국 측에 ‘우려와 실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지 말아 달라’고 한 정부의 요구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사실상 초치된 직후 세미나에서 만난 싱크탱크의 한 연구원은 ‘용납 불가’ ‘무책임함의 극치’ ‘동맹에 금 가는 소리’ 등 격앙된 표현을 늘어놓으며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갔다. 지한파 인사로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시해 온 그가 이렇게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미국의 반응에는 한일 관계에서 시작된 파장이 한미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으로 번지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녹아 있는 듯하다. 아직은 미국 정부가 우려도 표명하면서 지소미아 회복을 요구하고 있지만, 만약 한국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시작한다면 그건 경고음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미 관계를 회복하려면 정부는 미국의 의구심부터 불식해야 한다. 중요한 외교안보 결정에 대해 협의가 아닌 통보로 비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물밑에서 이뤄지던 외교적 행보들이 지소미아 파기 결정 이후 잇따라 공개되는 것도 우리 안보의 중심축인 한미 동맹을 위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지소미아 파기#한미관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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