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日王)이 그제 도쿄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여기서 과거를 돌아보고 앞선 대전(大戰·태평양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왕이 추도식에서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에 앞서 연단에 오른 아베 신조 총리가 역대 총리들과 달리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큰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라는 반성을 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헌법상 아키히토 일왕은 ‘상징적 국가 원수’이지만 일본 국민의 존경을 받고 영향력도 크다. 해마다 추도식에서 ‘깊은 슬픔’이라고 표현했던 일왕이 올해는 ‘깊은 반성’이라고 강한 어휘를 쓴 것은 전날 ‘아베 담화’에서 교묘한 간접화법으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은 아베에 대한 일침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왕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지만 “일본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국민들의 노력 덕분에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헌법을 재해석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달려가는 아베를 간접 비판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책임이 있는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는 과거사 정당화 움직임에 몇 차례 우려를 표명했다. 즉위 20주년이었던 2009년 11월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침략 전쟁을 망각하는 현상을 경계했다. 1992년 자신의 방중 때와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 만찬 연설에서 ‘깊은 반성’을 언급한 적도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이번 발언이 일본의 양심을 대변한다고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처럼 퇴행적 역사 인식으로 잘못된 과거사를 정당화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아베 담화’에 아쉬움을 표시하면서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일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은 합당한 해결을 요구하되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비롯한 경제 안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 협력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