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28>봄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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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그는 노모를 업은 채 좁다란 논두렁길을 걷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산은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회관 앞 공터까지 가려면 꼼짝없이 그 상태 그대로 논두렁길 끝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구두와 양복바지 밑단은 이미 흠뻑 젖어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우산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그는 목과 어깨에 바투 힘을 주어야만 했다. 두 손에는 노모의 앙상한 엉치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고, 그럴수록 자꾸 화가 났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였다. 요양원에서 걸려온 전화, 사라진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 네 번 다 똑같은 행보였다. 아니, 도대체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는 요양원 담당 직원에게 그렇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아버님 무덤으로 가시니까 불행 중 다행이죠. 그렇게 해서 못 찾는 어르신들도 꽤 많아요. 요양원 담당 직원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노모의 요양원을 바꾸진 않았다. 어딜 가나 다 똑같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빗줄기는 굵지 않았지만 바람이 제법 불었다. 비는 사선으로 대기를 그어 그의 이마와 눈썹 위에까지 와 닿았다. 노모는 그의 등에 한쪽 뺨을 기댄 채 말없이 업혀 있었다. 노모는 무겁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놓칠 것만 같았다. 노모의 검은색 털신에 초록색 잎사귀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봄비를 싫어했다. 학기 초에 내리는 봄비. 그때마다 그는 초록색 비닐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야만 했다. 얇은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과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던 비닐. 그는 그 초록색 비닐우산이 창피했다. 학기 초부터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명함을 여러 사람에게 대놓고 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비를 맞고 학교에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제였던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다니는 택시회사에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머니와 그는 예의 그 초록색 비닐우산을 쓰고 걸어갔다. 한데, 회사 정문에 막 도착했을 무렵, 어머니가 들고 있던 초록색 비닐우산을 내려 그의 몸을, 그의 정면을 가려 주었다. 머리 위가 아닌, 그의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하지만 초록색 비닐우산은 초록색 비닐우산일 뿐. 그는 반투명하게 보이는 초록색 비닐우산 너머로 자신의 아버지가 택시회사 사장에게 계속 뺨을 맞고 있는 걸 똑똑히 보고 말았다. 어머니는 굳은 듯 그렇게 오랫동안 비를 그대로 맞으며 그의 정면을 우산으로 막아 주었다. 그는 처음엔 어머니가 자신의 시야를 가려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 봐, 그러면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딜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차례 세찬 바람이 지나가더니 훌렁, 우산이 뒤로 넘어갔다. 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머리와 노모의 등 위로 평등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춘 채 논바닥 아래로 굴러떨어진 우산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영감, 왜 이렇게 비를 맞았소?”

그의 등 뒤에서 노모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노모는 자신이 입고 있던 누비 점퍼를 벗어 둥글게 우산처럼, 그의 머리 위로 펼쳤다. 그는 힐끔 누비 점퍼를 들고 있는 노모의 얇은 손목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뚝뚝하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뗐다.

“엄마, 아버지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을 해요. 내가 더 자주 올 테니까….”

그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그렇게 말을 했다. 세상은 어쩐지 그 옛날, 그가 초록색 비닐우산 너머로 보았던 것처럼 흐릿하게 변해갔다.

아무 말 없이 계속 그의 머리 위를 누비 점퍼로 가려주고 있던 노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 아무래도 감기 들겄소.”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
#봄비#논두렁길#우산#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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