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칸트와 튤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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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로베르(1614∼1685)의 튤립 그림.
니콜라 로베르(1614∼1685)의 튤립 그림.
꽃밭에 앉아 꽃잎을 보며 고운 빛이 어디서 왔을까 묻는 정훈희의 ‘꽃밭에서’부터, 내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와 꽃이 된 김춘수의 ‘꽃’을 지나, 근대 미학의 기초가 된 칸트의 꽃까지, 꽃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넓고 다채롭다. 과연 인간의 모든 심리를 표상하는 상징이고 은유이며, 인식의 도구이다. 긴장 풀린 긴 연휴 끝, 편안하게 꽃 이야기 한번 해 보고 싶다. 마침 꽃 피는 봄도 바짝 눈앞에 다가왔으니. 하지만 꽃 이야기라고 다 편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칸트의 꽃이라면.

정훈희의 꽃은 무슨 꽃인지, 김춘수의 꽃은 또 무슨 꽃인지, 가수와 시인은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의 꽃은 장미도 해바라기도 금작화도 아닌 튤립이다. 한 송이의 튤립은 아름답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어떤 목적(end)의 개념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전자나 냄비 같은 실용적인 도구는 아름답지 않다. 왜 그럴까? 거기엔 목적의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튤립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아무런 객관적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대상은 목적이 있으면 아름답지 않고 목적이 없을 때 아름답다.

튤립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내용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튤립에 관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고 있는 식물학자가 있다 해도 그가 튤립에 대해 단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튤립의 아름다움에 대해서이다. 그가 만일 튤립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윽한 눈길로 튤립을 바라본다면 그 순간 그는 식물학자이기를 그치고 미학자가 되는 것이다. 아직 튤립을 본 적도 없는 어린아이가 유치원에서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예쁜 튤립 꽃봉오리는 그 형태의 완벽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식물학적 지식이 우리의 미감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뭔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의 형식에 대해서이지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다.

유려한 곡선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조여져 있는 튤립 꽃봉오리의 형태는 무척이나 완벽하여 이것이 아무런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신앙인이라면 신의 뜻에 맞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것이고, 냉정한 인문학자라면 자신의 주관적 인식능력에 딱 맞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목적에 부합한다는 것을 철학 용어로는 합목적적(final to…)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대상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객관적인 목적은 없지만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 딱 부합되는 주관적 합목적성을 가질 때 아름답다.

‘목적’과 ‘합목적성’ 그리고 ‘형식’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합치면 칸트의 그 유명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form of finality without an end)’이라는 미의 정의가 나온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이 없지만 최소한 우리의 주관성에 대해서는 합목적적인 한 대상의 형식, 그것이 바로 미(美)이다.

개념 미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남성용 소변기도 화가가 서명만 하면 예술작품이 되는 시대에 칸트의 미학은 보편타당성이 있을까? 그러나 정치적 프로파간다임이 분명한 창작물을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는 예술가들에게는 칸트 미학의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일러두기. 튤립이라는 단어는 ‘판단력 비판’ §17의 끝 부분 주(註)에 딱 한 번 등장한다.

박정자 상명대 석좌교수
#칸트#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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