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63>이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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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메리 올리버(1935∼ )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현상―직립―이 필요했지.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혹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그래스(해안 습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 크리스마스펀(밀집된 단단한 잎을 가진 상록 양치식물), 병정이끼(원래 명칭은 British Soldiers로 빨간 열매가 달린 게 독립전쟁 당시 빨간 모자를 썼던 영국군과 닮아 이름 붙음)!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도 있지.

나는 가을에 장작더미에서 검은 귀뚜라미를 보면, 겁을 안 주지. 그리고 바위를 좀먹는 이끼를 보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사랑스러운 사촌.


지구는 둥글다지만 대기권 바깥에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나 둥글게 보일까, 하늘 높이 떠 있는 매의 눈에도 평평하게 보일 테다. 시야가 한정된 우리 작은 존재들에게 지구는 평평하다. 정구공 거죽을 기어가는 벌레, 가령 좀에게 정구공이 끝없는 평지로 여겨지듯이. 몸체가 작을수록 세계는 넓다. 제 큰 키를 자랑스러워하거나 다행스러워하는 게 요즘 추세인데, 다른 생물들은 그만두고 인류만 생각하더라도 그럴 일이 아니다. 땅덩이는 그대로인데 인구가 엄청 늘어난 마당에 점점 커지고 있는 인류의 평균 키는 재앙일 수 있다. 작은 생물은 적게 먹는다. 인류의 멸종 시기를 늦추려면 작아져야 한다. 그것이 진화일 테다.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란다.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그에 맞춰 몸을 줄인 마법의 순간, 세세한 자연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화자는 ‘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에까지 거슬러가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을’ 놀면서 모든 생물의 조상이 하나였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이끼, ‘사랑스러운 사촌’! 이런 생각을 하다니 진화는 위대한 기적이다. 이끼는 제가 우리와 사촌인 줄 모를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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