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리에서든 말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 가족 행사나 학부모 모임에서 정당이나 신앙을 화제로 삼았다가는 종종 파국이라는 쓴맛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비해 패션은 파격과 변화를 속성으로 하기에 드물게 ‘금기’가 없는 세계이다. 금기를 찾아내 조롱하고 파괴하는 사람을 ‘천재’ 디자이너라고 부르지 않는가.
하지만 패션계에도 금기가 있으니 바로 모피 이야기다. 매년 겨울 PETA 같은 동물보호단체에서 모피 반대 시위를 벌이고 중국산 토끼털을 사용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불매 대상으로 지명되기도 한다. 모피를 입지 않겠다고 선언한 유명인들은 ‘개념’인으로 박수를 받는다. 문명사회에서 모피를 입은 사람은 어디서든 빨간 페인트가 날아올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미드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은빛 모피를 입고 패션쇼장에서 나오던 서맨사가 시뻘건 페인트 세례를 받고 쿨하게 “이래야 뉴욕이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넣은 건 정말 현명했다). 사춘기 이래 모든 것을 공유한 두 소녀의 우정이 모피 때문에 끝장나는 일은 또 좀 허다한가.
그런데 최근 인조 모피가 전 세계적 유행으로 떠오르며 모피 논쟁은 절묘한 해결책을 찾아낸 듯했다. 거대한 제조유통일괄형(SPA) 매장과 홈쇼핑은 물론이고 가짜라는 말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리던 명품 브랜드의 쇼윈도도 ‘가짜’가 접수했다. 이래야 패션인 거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인조 모피가 갑자기 ‘에코 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에코 퍼’라는 말 속에는 동물권과 환경을 보호하는 윤리적 소비라는 주장이 들어있다. 과연 그럴까. 원래 ‘에코 퍼’는 농사에 해를 끼치는 동물의 모피만 판매한다는, 외국 기업이 만든 말이다. 대부분의 동물보호론자들은 ‘에코 퍼’ 역시 동물을 죽여 얻는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그 ‘에코 퍼’가 이번 겨울 화학섬유를 ‘친환경 털’로 둔갑시켜 인기를 얻고 있다. ‘에코 퍼’는 기본적으로 석유에서 추출되므로 가공에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고 결국 지구 전체에 피해를 준다. 한마디로 친환경적이라고 자랑할 만한 소재는 아니다.
‘에코 퍼’는 ‘특정한’ 동물을 죽여 얻은 모피를 ‘에코 퍼’라고 부른 것만큼이나 소비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가죽이나 비닐 손잡이를 단 염색 가방이 ‘에코 백’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편의점 비닐봉투만큼이나 흔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에코 퍼’ 마케팅은 사람들이 ‘가짜’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인조’를 ‘에코’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인조 모피가 진짜를 밀어낼 만큼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완벽하게 눈속임이 가능할 만큼 섬유 제조기술이 발전해서가 아니라 내놓고 ‘우리는 인조 모피’라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명한 색, 만화 같은 무늬, 이불을 뒤집어쓴 듯 과장된 디자인이 ‘싸구려’ 인조 모피와 맞아떨어져 값비싼 모피의 허세를 조롱하며 젊은 세대의 저항적 감성을 표현한다. 여기서 인조 모피는 가짜가 아니라 매서운 신자유주의 시대의 추위를 견뎌야 하는 젊은이들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진짜 패션이다. ‘샤넬’이 인조 모피 컬렉션을 선보인 건 이 같은 흐름을 재빨리 담아낸 ‘천재’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덕분이고.
패션에서 인조 모피는 더이상 가짜가 아닌 시대다. 인조 모피를 ‘에코 퍼’라 부르는 건 ‘에코’가 가짜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짜로 덕을 보는 건 탐욕스러운 기업이다. 인조 사슴도 아닌 진짜 사슴이었기에 더 억울했을 ‘지록위마’가 패션에 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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