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12>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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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1978∼ )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
젖은 발로 잠들었다
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
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
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도시로 간 언니들은 오지 않을까
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
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도 같았다      
        

어린 시절은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가 이따금 다른 삶을 꿈꾼다. 자상한 아버지, 늘 예쁘게 화장을 하고 있는 엄마, 형제자매가 헤어져 있지 않고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사는 집. 그런 축복받은 가정은 드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뿐일까. 우리는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선택되는 것이다.

시인은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만’ 같은 나이, 사춘기가 막 시작되려는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다. 춥고 쓸쓸한 겨울의 기억.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늘 화가 나 있는 무서운 아버지. 제 고된 삶이나 세상에 대해 화가 난 거지만 만만한 게 가족이라 집안에서는 화를 참지 않고 벌컥 터뜨리곤 했을 테다. 큰 딸들은 대처에 나가 있으니 남은 딸 중 큰 애인 시인의 뺨을 때리기도 했나 보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다니 잘 먹지 못해 혈색도 좋지 않았을 여자아이….

섬세한 시어에 애절한 서사를 담은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에서 옮겼다. 위 시의 아버지와 언니들이 담긴 시를 소개한다. ‘날계란을 쥐듯/아버지는 내 손을 쥔다/드문 일이다//두어 마디가 없는/흰 장갑 속의 손가락/쓰다 만 초 같은 손가락//생의 손마디가 이렇게/뭉툭하게 만져진다’(시 ‘신부입장’) ‘신새벽 논산 오일장에 우시장이 열렸다/고삐를 당기자/송아지는 자꾸 어미 소 곁에서 뒷발로 버텼다/머리에 홍화씨만 한 뿔이 돋아 있다//열일곱에 여공이 된 큰언니가/서울로 간 직행버스를 타던 날도 그랬다’(시 ‘입동’)

황인숙 시인
#연#신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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