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13>얼룩무늬나비 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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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무늬나비 떼
―김은경(1976∼ )

밤 빨래를 넌다
마당에서 백년을 산 플라타너스
검은 얼굴을 하고
바스락 바스락
수국 지는 소리
거기 희미한 그림자는 또 발에 차인 흐느낌
몸을 덮던 옷가지들
발가락엔 힘이 없고
목덜미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주일 치 삶이
견딘 중력의 힘은 투명하다
치명의 중심부로 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부림을 쳤나
땀내 나는 시간이
이렇게 구김으로 남더라고
빨랫줄을 잡아당긴
모과나무는 향기롭다
지퍼도 단추도 잠그지 않은
빨래들이 펄럭인다
묵은 그대,
손금이 닳아갈수록
바싹바싹 새로워지는 것들,
지금은 속까지 다 비치는 날개들
한 줄에 매달려 펄럭인다
얼룩이 곧 이름이 된
얼룩무늬나비처럼


사람들 눈에 화자는 고운 옷을 입은 우아한 자태의 여인일 테다. 어렸을 때 집 근처 대학 교정을 지나가다 본 이른 아침 풍경이 떠오른다. 풀밭 여기저기 잠자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날개가 젖어 꼼짝 못하고. 그 어디 나비도 있지 않았을까. 잠자리도 나비도 한 벌뿐인 옷을 매일매일 밤이슬에 헹궈서 툭툭 털어 말리겠지. 그래서 그들은 언제 봐도 깨끗한 거다.

사람이 단정하고 고운 모습을 지키려면 ‘몸을 덮던 옷가지들’을 누구 손으로든 빨아야 한다. 화자는 제 손으로 빨래를 한다. 화자는 바쁘게 사는 사람인가 보다. 일주일에 한 번 밤에야 빨래를 해서 넌다. 발가락에 힘이 없도록 지쳐 있어도 ‘목덜미에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니 손빨래를 했나 보다. 화자가 워낙 깔끔한 성격이고, 즐겨 입는 옷의 재질이 잠자리나 나비 날개처럼 섬세해서일 테다.

‘백년을 산 플라타너스’가 있고 수국이 만발한 마당에서 모과나무 사이에 맨 빨랫줄에 빨래를 널다니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삶터의 정취를 만끽할 정서도 거의 바닥난 화자다. 나비같이 옷을 떨쳐입고 ‘치명의 중심부로 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집 밖에서의 ‘땀내 나는 시간’에 화자의 마음은 구김이 갔다.

그래도 손금이 닳도록 바락바락 빨아 넌 옷들, 날개들이 알록달록 ‘한 줄에 매달려’ 펄럭이는 걸 보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을 테다. 지퍼와 단추로 여미고 긴장하던 ‘일주일 치 삶’의 묵은 때를 빨아 헹궈서 ‘새로워지는 것들’로 오는 한 주를 맞을 채비를 하는 빨래 너는 시간.

황인숙 시인
#얼룩무늬나비 떼#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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