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78>고구마, 고구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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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고구마들
―이경림(1947∼)

자, 이 고구마를 먹어치우자

불그죽죽한 껍질을 벗기고
노오란 속살을 먹어치우자
속살같이 들큰한 시간을 먹어치우고
허벅한 뒷맛도 먹어치우자

뽀오얀 접시 위에 놓인, 아니
넓적한 탁자 위에 놓인, 아니
더러운 마룻장 위에 놓인, 아니
컴컴한 구들장 위에 놓인, 아니
수천 겹 지층 위에 놓인, 아니
수끌거리는 용암 위에 놓인
이, 뜨거운 고구마를 먹어치우려고 나는

저 뜨거운 해에서 생겨나
번쩍이는 수천만의 별 사이를 흘러내려
묵 같은 허공을 수세기 떠돌다가
이 비스듬한 지붕 밑
넓적한 탁자 옆
볼기짝만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보라,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한 섬광이 지금
고구마만한 불덩이를 먹어치우고 있다

보라, 이 불덩이가 식도를 태우며
저수만리용암의길로쏜살같이 달려가는장관을,
이 장엄한 불의 식사를!


먹어치우다…. 화자는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고구마가 더 이상 방치하면 못 먹게 될 상태라서 ‘치우자’고 얼른 솥에 올려놨던 걸까. 둘째 연으로 미루건대 현재 화자는 고구마가 썩 당기지 않나 보다. ‘불그죽죽한 껍질’, ‘들큰한’ 속살, ‘허벅한 뒷맛’이란다. 화자와 고구마, 그 뜬 사이가 뜨거운 고구마를 먹는 시간을 ‘장엄한 불의 식사’로 만든다. 고구마가 맛있었다면 딴청을 부리지 않았을 테다. 딴청을 부리지 않았으면 ‘저 뜨거운 해에서 생겨나/번쩍이는 수천만의 별 사이를 흘러내려/묵 같은 허공을 수세기 떠돌다가’ 몸을 얻어 ‘볼기짝만한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생명의 신비를 새삼 깨닫지 못했을 테다.

화자는 혼자서 고구마 하나를 먹을 때도 갓 쪄낸 것을 ‘뽀오얀’ 접시에 담아 탁자 위에 놓는구나. 단정하게 사는 사람이다.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와사비 발린 완두콩을 깡통째 끼고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며 추리소설을 읽다가, 전부 들고 침대로 자리를 옮기곤 하는 나와는 대조적인 삶의 자세다. 눈을 뜨면 깡통에서 쏟아진 완두콩이 등짝 아래 즐비하고 목덜미에도 붙어 있지. 동화 속 어떤 공주는 스무 장 매트리스 아래의 완두콩 한 알 때문에 잠 못 이뤘다는데, 둔해도 너무 둔하고 추해도 너무 추하다. 이경림은 자다가도 시가 나오고 먹다가도 시가 나오는 시인!

황인숙 시인
#고구마#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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