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이런 건 어떨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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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아버지의 꿈은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것이다. 틈틈이 독서를 하고 글을 쓰신다. 컴퓨터 대신 볼펜이 아버지의 친구다. 수첩이나 박스를 찢어서 그때그때 사용하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가끔 이런 내용으로 책을 쓰면 어떨까, 딸에게 넌지시 묻기도 하고 필요한 책 주문을 부탁하시기도 한다. 언젠가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더니 편집장이 자신이 쓴 편지와 책 3권을 보내왔다고 했다. ‘원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하다. 열정은 놀랍지만 원고는 보완이 필요하다’란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의 표정은 뭐랄까, 소년 같았다.

어머니 역시 다르지 않아서 예술에 대한 로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교과서만 보고 쓱쓱 근사하게 그려내던 솜씨를 아직도 기억한다(중학교 시절 내 미술 숙제였다). 아쉽게도 이후로 내가 어머니의 그림을 볼 기회는 없었다. 몇 년 전에 어머니가 수줍게 “미술대학을 가 볼까” 하고 말을 꺼내신 적이 있다. 늦은 미대생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붓을 잡는 모습만큼은 지금 당장 봐도 어색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나는 두 분의 노후가 편안하길 바란다. 무엇보다 그냥 오래 사는 거 말고, 두 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노후였으면 좋겠다. 두 분은 평생 부끄러운 일 없이 열심히 사셨지만 모아둔 재산은 없다. 이 상태에서 부모님이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가가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저소득에 불안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 일자리’라는 말부터가 사실 ‘노인도 일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니 무책임한 느낌마저 든다. 일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해서 노구를 이끌고 일을 해야만 하는 노후는 생각만 해도 팍팍하다.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대신 지금까지 일한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는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복지 시스템 구축이 우선일 것이다.

기왕 일자리를 만든다면 단순 반복노동 대신 할머니가 유아교육기관에 파견돼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같은 모델을 좀 더 만드는 건 어떨까? 더 좋은 방법은 개인의 창작을 지원하는 것이다. 노인을 수혜자가 아니라 창작자로,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는 대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다. “내 살아온 이야기만 해도 대하소설 몇 편은 너끈히 나온다”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울 관악구의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사업’처럼 자서전 집필, 발간비용을 지원해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음 세대와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서재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자 어른들의 흔한 말씀 중에 “예술을 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로…”가 있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제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아직 늦지 않았고, 인생은 길다. 형식이나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박재동 화백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에 자기가 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고, 그만한 즐거움을 누리기에 문화예술만큼 괜찮은 지름길도 없다.

솔직히 나는 부모님의 세월에 숨겨진 이야기를 잘 모른다. 당신들을 사랑하지만 당신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내게 있어 당신들은 처음부터 부모님이었으니까. 내가 아버지의 책을 읽고 어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당신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도 그럴 것이다.

백발의 노인이라고 해서 꼭 거장일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의 창작자면 그만이다. 자신의 내면과 만나 그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삶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의 어른들은 존중받아야 하며, 그 존중의 방식은 그들의 인생에서 쌓인 무엇인가를 자신의 방식대로 내놓고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다. ‘숨겨둔 손거울 같은 당신의 삶’(박형준 시 ‘봄 우레’)을 꺼낼 수 있도록. 한 사람의 딸로서 부모님의 꿈을 응원한다. 그러니 국가도 부모님들의 꿈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대단한 예술혼이 숨쉬는 예술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정지은 사회평론가
#은퇴#노후#노인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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