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00>악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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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도종환(1954∼)

언덕 위에서 누군가 트럼펫을 분다
그때 우리가 불었던 악기도 저런 소리를 냈었다
서툴지만 뜨거웠던 소리
열정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라고 믿었던 소리
미숙하지만 노래 한 곡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던 소리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소리
몸속으로 악기소리만을 서둘러 채우고는
민망하여 허겁지겁 악기를 챙겨 넣으며
지퍼를 올리던 날들
너무 이르거나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
스쳐가고 만 사람들
저 악기소리 속에는
그런 순간 그런 얼굴이 들어 있다
이제 나의 악기소리는 매끄럽지만
열정의 뜨거운 숨소리는 없다
내가 뿜어내는 음표들은 세련된 활이 되어 날아가지만
그때 그 풋풋함은 없다
언덕 위에서 누군가 젊은 트럼펫을 분다


악기 하나쯤 그럴싸하게 다루고 싶다는 로망을 품었던 이들이 많을 테다. 들어줄 만한 연주를 익히기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 가까이에도 어렵사리 악기를 장만하고 시간을 내서 배우러 다니다가 집어치운 사람이 여럿이다. 대금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는 친구가 들려준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그가 지하철에 탔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악기 케이스를 흘깃거리며 “낚싯대 같은데?” “아니, 엽총이야.” 이러쿵저러쿵하더니 한 소년이 다가와 뭐냐고 묻더란다. 그가 “대금이요”라고 알려주자 소년이 친구들에게 전하더란다. “칼이란다! 대검이란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그 친구는 ‘으’를 ‘어’로 발음했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에게 ‘짠!’ 하고 들려줄 꿈에 부풀어 아무도 모르게 배우고 익히던 악기들, 지금은 어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까.

동네 뒷동산, 언덕 위에서 누군가 트럼펫을 분다. 서툴지만 뜨겁게 불어대는 트럼펫 소리. 멜로디 비슷한 걸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행복한, 그 풋풋한 열정이 화자의 가슴을 아릿한 회상으로 물결치게 한다. 무게도 기교도 의미도 없지만 젊디젊은 트럼펫 소리. 오직 자기의 뜨거운 숨을 불어넣어 뿜어낸 음표들이 대기 속에 울려 퍼지누나. 언덕 위 저녁 하늘에 펼쳐지는 삶의 미개(未開) 시절의 실루엣이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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