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미카사 기념함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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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때 일본 승리의 상징… 2차대전 후엔 댄스홀 되는 굴욕
조선은 힘 한번 못쓰고 전쟁 결과 속국으로 전락
다시 격동의 시기 맞아 ‘힘 있는 나라’ 이룰 수 있을까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일본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05년 러일전쟁 승리였다. 서구 열강들이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로 삼던 시절이었다. 중국의 지도자 쑨원은 “동양인이 서구인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전쟁의 승패는 1905년 5월 쓰시마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판가름 났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 38척 가운데 21척을 격침시키는 완승을 거뒀다.

당시 전투에서 일본 연합함대의 총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를 태우고 선두에 나섰던 전함 미카사는 지금도 도쿄 인근의 요코스카 해안에 남아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전쟁 영웅 도고 제독이 전투 내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지휘를 했다는 자리에는 ‘도고’라는 표지판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일본을 위기에서 구한 배로 인정받은 미카사는 1926년 ‘미카사 기념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요코스카에 영구 보존됐다. 그러나 영광의 뒤편에는 참담한 굴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소련은 일본을 점령한 미국에 이 배의 해체를 요구했다. 러일전쟁 때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절충안으로 갑판 위에 있는 대포 마스트 등 구조물을 모두 뜯어냈다. 그 자리에는 미군을 위한 댄스홀과 수족관이 들어섰다. 미카사는 1961년 원래 모습을 되찾았지만 역사라는 것이 패자와 승자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냉혹한 무대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러일전쟁의 첫 포성은 한국의 인천에서 울렸다. 일본 군함이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순양함 바랴크 등을 항구 밖으로 끌어내 전투를 벌였다. 수세에 몰린 러시아 군함은 항복 대신에 스스로 배를 침몰시키는 자침(自沈)을 택한다. 그 전투가 1904년 2월 시작됐으므로 내년이면 110년을 맞는다. 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두 나라의 줄다리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13일 한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인천 연안부두를 찾아가 당시 숨진 바랴크함 장병들을 추모했다. 인천시는 이 배의 침몰 때 걸려 있었던 깃발을 소장하고 있다가 러시아에 빌려 주었으나 러시아 측은 10년간 더 대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과거의 치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하다. 푸틴의 인천 방문 사흘 뒤인 16일 일본 방위상은 쓰시마의 방위시설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 기업이 일본 방위시설 근처에 땅을 매입한 것을 문제 삼았다. 쓰시마는 러일전쟁 때 핵심 군사기지로 활용됐던 곳이다. 신경전의 성격이 감지된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올해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2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의 외교, 국방장관이 함께 만나는 ‘2+2회담’을 개최했다. 서로 웃으며 악수하지만 속내는 다른 모습이다. 러-일 관계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국의 역학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치열한 국력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중 가장 힘이 부치는 나라는 한국이다.

러일전쟁은 조선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객관적 전력이 우세했던 러시아가 이겼더라면 조선은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항구를 원했던 러시아가 인천에 러시아 총독부를 세웠을 것이라는 가설도 나온다. 조선은 당시 군함으로 3400t짜리 ‘양무함’ 한 척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일본은 1만5000t짜리 미카사를 포함해 수십 척의 함대를 보유했다. 고종실록을 보면 당시 우리 조정은 “나라 살림도 없는데 쓸데없이 왜 군함을 사들였느냐”며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은 전쟁의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었다.

지난달 14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국회의원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시라”고 하자 “내 나라가 힘이 없어 우리들이 끌려갔다”면서 “우리나라도 남한테 의지하지 말고 우리와 같은 일이 다시는 안 생기도록 서로가 힘써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열쇠를 쥐고 있는 국회와 정치권의 모습은 한마디로 지리멸렬이다. 특히 대선 패배의 분을 삭이지 못한 야당은 바깥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극한투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00여 년 전 위용을 아직도 드러내고 있는 미카사는 다시 찾아온 이 격동의 시기에 어떻게 강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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