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뽑기의 고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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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공짜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남편은 뽑기에서 떨어지는 법이 거의 없다. 지난 연말에도 100명쯤 모인 모임에 갔는데 마지막 순서로 행운권 추첨이 있었다. 나의 번호는 ‘9’, 남편의 번호는 83번. 남편은 “에이, 38따라지네”라고 투덜거렸다. 애당초 내 운보다 남편의 행운에 희망을 거는 내가 황급히 수정했다. “무슨 소리, 38광땡이네.” 옆에 있던 지인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와아, 되게 긍정적이시네요.”

드디어 행운권 추첨이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성형외과 의사가 내어 놓은 레이저 시술권을 뽑는 탐나는 선물도 있었는데 나는 역시, 불림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점점 추첨에 몰입하는 가운데 선물은 커지고 수혜자 수는 줄더니 마침내 가장 큰 선물 하나만 남았다. 함께 간 지인들은 그동안 뭔가 하나씩 받고 즐거워하는데 우리 부부만 ‘꽝’이어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려는 찰나, 사회자가 소리쳤다. “행운의 1등 상품을 받을 분은 51번!” 에이, 정말 38따라지였나 보다. 어,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51번이 먼저 가셨나 보네요. 안 계시네요. 그럼 다시 뽑겠습니다. 83번!”

그러면 그렇지! 남편 행운이 그냥 비켜 갈 리가 없었다. 파티 주최 측인 디자이너가 그날을 위해 만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첨된 행운의 선물은 뱀가죽으로 만든 화려한 클러치백이었다. 나는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마치 연말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수상자처럼 무대로 나갔다. 생각해 보니 2013년은 뱀의 해인데 뱀가죽으로 만든 백이라니, 새해에는 아무래도 재수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물씬하다. 그래서 내친김에 남편에게 주문했다. “여보, 아무래도 당신의 재능을 그냥 썩히긴 아까워. 로또 한 장만 사 봐 응?” 나의 과한 믿음이 부담스러운지 남편은 얼른 발뺌을 한다. “난 벌써 로또 탔어. 당신을 나의 아내로 뽑았잖아.”

뽑기 재주가 없는 내가 뽑은 뽑기의 고수 나의 남편. 그리고 뽑기의 고수가 뽑은 공짜 복이라곤 없는 아내. 과연 누가 더 뽑기의 고수일까?

이 대목에서 시댁 형님 내외의 일화가 생각난다. 두 분이 서로 “내가 사람을 잘 본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기야 사람을 잘 본 증거를 대는 기 싸움으로 번졌는데, 아무래도 말싸움에서는 밀리는 아주버님이 궁지에 몰리자 마침내 결정타를 날렸다. “당신은 그렇게 사람을 잘 봐서 나하고 결혼했어?”

부부 사이에서 누가 뽑기의 고수인지, 누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지, 이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 그렇다면 상대를 행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상대방 눈이 정확하다고 믿는 사람이 승자일 것이다. 아무튼 이번 행운권 추첨을 계기로 나는 나 자신을 뽑기의 고수라고 믿기로 했다. 어쨌든 그날 모임에서 가장 멋진 행운의 선물은 내 손안에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윤세영 수필가
#뽑기#추첨#공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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