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6>재봉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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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
―김종철 (1947∼ )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한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 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레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儀式)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織造)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 일을 엿듣고 있다


창밖에는 목화송이 같은 눈이 나리고, 젊은 아내는 태어날 아기의 옷을 짓고 있다. 나무들도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 털옷을 입고 있고, 모두가 축복 받은 듯한 따뜻한 겨울날. 이 아름다운 평화에 설레며 시인은 몽상에 젖어든다. 겨울은 태어나길 기다리는 존재들이 저마다 어머니의 깊은 내부에서 쉬고 있는 회잉(懷孕)의 계절이라는. 정결하고 단아하고 부드러운 시어들을 나직나직 허밍으로 들려주는 겨울 서정. 어디선가 은은히 연주하는 ‘아베마리아’가 들리는 듯하다. 이미 태어난 생명들한테도 다행스러운 이 겨울 되기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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