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채(永久債)는 ‘빌린 돈이지만 영구적으로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보도 없고 상환기한도 없고, 상황에 따라 이자도 안 줄 수 있다. 최근 두산인프라코어(두산)가 발행한 영구채가 재계와 금융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핵심은 영구채를 부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본으로 볼 것인가에 있다.
금융회사만 가능하던 영구채는 올해 4월 상법이 바뀌면서 일반 기업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첫 테이프를 끊은 곳이 두산이다. 두산은 국내외 로펌과 회계법인의 조언을 받고, 수차례의 상품 구조 수정을 거쳐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국제회계기준(IFRS)상 자본으로 인정된다”는 ‘잠정의견’을 받아 냈다.
회계 분야에서 바이블로 여겨지는 국제회계 기준은 3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자본으로 인정한다. 우선 만기가 없어서 원금상환 의무가 없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이자 지급에 대한 재량권(裁量權·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이자를 안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상환순위가 일반채권보다 후순위여야 한다. 정용원 금감원 회계제도실장은 “두산 영구채는 3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고 설명했다.
두산은 10월 발행한 영구채로 5억 달러(약 5400억 원)를 끌어모았다. 발행일로부터 5년까지는 연 3.38%의 금리를 적용하는 조건이다. 5년 뒤에 갚아도 되지만 상환하지 않으면 금리를 2배로 주기로 했다. 하지만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 이자는 안 줘도 된다.
5억 달러를 자본으로 산입하면서 두산의 부채비율은 100%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에 영구채 발행이 기업의 부채 비율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묘수’라는 주장과 재무구조에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꼼수’라는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
영구채를 사들인 투자자들이 두산의 신용만 보고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이 회사의 채권은행단인 산업·우리·하나은행이 수수료를 받고 지급보증을 섰다. 두산이 돈을 못 주면 이들 은행이 원금과 이자를 줄 것이기에 투자자들은 안심하고 두산 영구채를 산 것이다. 외국에서 영구채가 발행된 사례는 있지만 은행이 지급보증을 선 사례는 없다.
영구채를 둘러싼 논란은 이처럼 복잡하고 생소한 상품 구조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시장의 혼란으로 확대된 것은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의 ‘엇박자’가 빌미를 제공했다. 금융위는 두산 영구채가 발행되고 한 달이 넘게 지난 뒤에 “자본으로 보기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시장이 화들짝 놀라자 금융위는 “유권해석의 권한이 있는 한국회계기준원이 판단해야 한다”며 한발 물러섰다.
금융위는 “자본으로 인정되면 부작용이 우려돼 법적 권한이 있는 회계기준원에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금감원의 해석은 달랐다. “상급기관인 금융위와 협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유권해석을 내린 것에 불만을 품고 뒷다리 잡기에 나섰다”고 보고 있다.
금융위가 영구채에 눈을 부라리자 시장은 곧바로 움츠러들었다. 눈치 빠른 은행들이 영구채 발행에 소극적이 됐고, 영구채 발행을 준비하던 대한항공은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으로 자금조달 방법을 바꿨다.
회계기준원이 두산 영구채를 묘수로 볼지, 꼼수로 판단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번 논란으로 금융위-금감원의 현 감독기관 체제의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부각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금융 감독 체제 개편에 대한 논의가 무성한 상황에서 두 기관이 자신들의 입지를 갉아먹는 악수(惡手)를 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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