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지향]내가 만난 에릭 홉스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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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도서관장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도서관장
구부정한 모습에 은발을 휘날리며 바쁘게 전 세계를 누비던 에릭 홉스봄 선생이 1일 세상을 떴다. 95세라는 천수를 누렸지만 선생의 죽음이 아쉬운 것은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누구에게도 비견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쏟아진 애도물결이 입증한다. 영국 주요 일간지가 서거 소식을 1면 가득 실은 이유는 선생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큰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얼치기 좌파’처럼 일방적 미화 안해

선생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불렸지만 그런 표현을 한참 넘어선 분이다. 무엇보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공산권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고 경제적 결정론과 같은 도식을 거부했다. 인간의 의식과 문화를 경제조건 못지않게 중시했다. 구소련에서 선생의 저서가 한 권도 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은 공산당을 끝내 떠나지 않았는데 이유는 이념보다 동지애였다. 1917년생 유대계인 선생은 나치가 막 득세한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갔고 국제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언젠가 선생과 대화하면서,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 후 많은 좌파 지식인이 공산당을 떠났을 때 왜 남았는지 물었다. 선생은 “고난을 함께했던 동지들을 배반할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현실 정치에서 선생은 노동당을 지지했다. 1980년대에 대처 총리에게 패배한 노동당이 더욱더 좌파의 길을 갈 때엔 노동당이 유연해져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개혁은 바로 선생의 가르침에 착안한 것이었다.

선생은 평범한 사람들을 연구하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한 선구자다. 1950년대까지 역사연구의 주제는 엘리트였는데 선생은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역사학의 방향을 바꿨다. 영국 노동계급, 이탈리아 농민반란, 라틴아메리카 의적이 선생 덕분에 살아났다. 그렇다고 얼치기 좌파 학자들처럼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선생은 사람들을 저항으로 몰고 간 상황을 분석하고 고발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무모함과 잔인함에도 눈감지 않았다. 진정한 역사학자의 모습은 그런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선생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혁명의 시대’로부터 ‘극단의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세계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선생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이중혁명’이라 명명한 이래 그 개념은 근대사회를 분석하는 확실한 기준이 됐다. 선생은 한 국가가 아니라 전 지구적 역사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을 가까이 접한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선생의 지식과 호기심에 감탄하곤 했다.

나는 1982∼83년 박사학위 논문 자료 수집차 런던에 1년간 머물렀을 때 선생과 첫 인연을 맺었다. 내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선생도 가을 학기마다 가르쳐 강의도 들었다. 1987년 봄 한국에 오셨을 때에는 강연 통역도 하고 경주여행에도 동행했다. 당시 선생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억제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지만 동시에 급속한 근대화에 감탄했고 ‘네가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태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생전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이해 강조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선생의 영향력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선생이 그처럼 중히 여기던 좌파 정치에 대한 충성도, 자본주의 비판에도 더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생의 가르침 하나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즉 인간과 역사, 특히 약자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필요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실천할 자신은 없지만 그 가르침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해 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 기사’와 빌리 홀리데이의 재즈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사랑했던 선생이시여, 편히 쉬소서.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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