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중현]‘비전’은 디테일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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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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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털….”

비밀 전승의 순간, 아버지는 숨을 거두며 아들에게 이 한마디만 남겼다.

짚신을 삼아 먹고살던 아버지와 아들은 장이 서는 날이면 나란히 좌판을 벌였다. 아버지의 짚신은 반나절도 안 돼 모두 팔렸다. 반면에 아버지와 똑같은 기술로 만든 아들의 짚신은 장이 끝날 때까지 절반이 안 팔리고 남았다. 까닭을 물어도 아버지는 “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며 끝까지 아들에게 비밀을 숨겼다.

아버지의 짧은 유언을 놓고 고민하던 아들은 아버지와 자신의 짚신을 꼼꼼히 뜯어보고 나서 이유를 깨달았다. 아버지의 짚신은 작은 검불까지 정성스럽게 뜯어 내 신는 사람이 편안했지만 자신이 만든 짚신은 까슬까슬한 잔털이 남아 사람들이 피했던 것이다. 그 후 아들은 노력을 거듭한 끝에 짚신의 명장(名匠)이 됐다고 한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수석무용수 서희 씨(26)는 최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지젤’ 무대에 서기 전 선배 발레리나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무용수 강수진 씨(44)와 자신을 비교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가까이서 본 강 선배의 손동작, 눈 동작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초보는 큰 그림만 보지만, 대가(大家)는 작은 디테일(detail)로 승부한다는 걸 그때 느꼈다. 난 아직 멀었다.” 겸손함뿐 아니라 20대 중반에 이미 초보와 대가를 가르는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명확히 인식했다는 점에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 메이저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된 그의 공력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술 분야에서 디테일은 전체에 대비되는 세밀한 표현을 뜻한다. 서 씨 말처럼 같은 작품을 연주하거나 연기하더라도 진정한 실력차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때로 ‘종합예술’로 불리는 정치 분야에서 나타나는 정치인들의 디테일 부족을 보면서 이들의 실력을 의심하게 되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최근 동아일보는 대선주자들의 ‘디테일 오류’들을 묶어 보도했다. 이 기사가 민주통합당 손학규 상임고문이 대기업의 고용 실태를 언급하며 잘못된 통계를 인용한 부분을 지적하자 다음 날 손 고문은 “관심을 갖고 오류를 지적해 줘 감사하다”며 지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정치인이 이렇게 ‘쿨’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이달 9일 “이명박 정권 5년간 우리 경제는 불과 3.1% 성장했다. 참여정부의 4.3%에 비교하면 정말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기 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성장률은 세계경제 상황과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 5년간 세계 경제가 연평균 4.7% 성장할 때 한국 경제는 4.3%로 뒤처졌다. 이명박 정부의 성적표가 좋진 않아도 올해 국제통화기금(IMF) 전망치를 포함한 5년간 성장률은 3.1%로 세계경제성장률(3.0%)을 조금 앞지른다. 작은 차이 같지만 이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긴 말실수를 지적당한 현장 정치인들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처럼 녹화된 TV프로그램이나 책으로만 자신을 표현한다면 이런 디테일 오류가 겉으로 드러날 일도 없을 테니까.

세계경제가 악화일로에 놓인 불확실성의 시대에 국민은 비전을 갖춘 지도자를 원한다. 비전(秘傳)이건 비전(vision)이건 핵심은 항상 디테일에 있다. 명장이나 대가급 지도자를 뽑는 데 필요한 건 숨겨진 디테일을 제대로 읽어 내는 국민의 능력이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비전#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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