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권 신뢰 더 추락시키는 박희태 의장의 ‘어물쩍’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9일 03시 00분


박희태 국회의장은 어제 귀국하면서 2008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박 의장은 이어 “검찰 수사에 따라 책임을 지겠다. 다만, 사죄하는 마음으로 4월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의장직 사퇴를 거부하는 대신 총선 불출마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돈봉투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같다.

한나라당 전대 돈봉투 사건의 검찰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전대 당시 박희태 캠프에서 서울 및 원외 조직을 맡았던 안병용 씨가 돈봉투를 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박 의장 주변 인사에 대한 조사도 본격화하고 있다. 박 의장의 비서였던 고모 씨는 강도 높은 검찰 조사를 받았다. 박희태 캠프의 조직 재정을 총괄했던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비서관에 대한 검찰 소환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검찰 수사가 박 의장 주변으로 뻗어가는 상황에서 “4년 전 일이라 기억 못 한다”는 변명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한나라당 친이(친이명박)계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특정 계파 죽이기라며 볼멘소리를 내지만 비리 근절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 전대 돈봉투는 여야를 가리지 않은 구시대적 관행이었다. 무조건 덮을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다 털고 가야 한국 정치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

박 의장이 불출마 카드로 급한 불을 끄려 한다면 6선 의원 출신 입법부 수장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 국회의장의 남은 임기는 4개월 정도다. 박 의장이 얼마 남지 않은 임기에 연연하다가는 한나라당 정권의 추락을 가속화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의장직을 내놓고 검찰 수사에 당당히 응하는 것만이 국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민주통합당은 박 의장의 귀국에 맞춰 국회의장 사퇴 촉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민주당은 결의안 제안 이유에서 “박 의장이 진위를 떠나 의혹을 받는다는 자체만으로 국회의 수치이자 나라 망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작 자신의 돈봉투 의혹에 대해선 모른 척하면서 박 의장 공격에만 날을 세우는 것은 이중 잣대다. 박 의장에겐 무조건 사퇴를 촉구하면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임종석 전 의원을 당 사무총장에 내정한 것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부끄러운 행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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