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망각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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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1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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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2008년 3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유세장.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1996년 대통령 부인으로 보스니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저격수의 총격이 있었어요. 환영식이 예정돼 있었지만 우린 머리를 숙이고 차를 향해 달려야 했죠.”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의 국정 수행을 도왔다는 과시였다.

그러나 얼마 후 공개된 당시 사진과 동영상은 딴판이었다. 공항엔 저격수도, 총소리도 없었다. 힐러리는 딸 첼시와 활주로를 여유롭게 걸어 환영식장으로 갔다. 꽃다발을 받고 악수를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거짓말쟁이로 몰리자 힐러리는 “잠을 못 자 기억력이 흐려졌다”고 변명했다. TV 대담 프로그램 ‘투나이트쇼’에 출연해서는 히죽거리는 진행자 제이 리노에게 “나 여기 못 올 뻔했어요. 저격수들이 총을 쏴대는 바람에 꼼짝 못했거든요”라며 자신을 개그 소재로 삼으면서까지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거짓말하는 건 안 되고 잊어버리는 건 괜찮다? 보통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치인, 특히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에게 망각은 거짓말 못지않게 심각한 장애라고 나는 본다. 거짓말은 사람됨의 기본을 의심케 하는 정치인의 결격 사유이지만 탄로 나면 바로잡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망각은 지금 내가 틀어쥔 가치만이 진실이라는 독선과 맹신을 낳는다. 그로 인한 무능과 실책과 혼란이 나라를 거덜 낼 수도 있다. 더구나 정치인의 망각이 실제로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잊어버린 척’ 하는 거라면 아주 질이 나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행적을 잊어버린 건지 잊어버린 척 하는 건지 모를 정치인이 여럿이다. 유승민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무상급식 포퓰리즘에 편승해 ‘4대강에 22조 원을 쏟아 붓고 아이들 밥 굶기는 정부’를 몰아세운다. 대기업을 깎아내리고 감세도 반대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세금 줄이고 규제 풀겠다는 박근혜 후보 보수정책을 수립한 주역이다. 그러면서 최소 10조 원이 드는 자기네 표밭의 동남권 신공항은 “다음 국회, 다음 정부의 최우선 추진 과제”라고 한다. ‘좌(左)클릭’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지난 4년간 치열하게 부딪치며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한 것도 아니고, 동료의원에게 ‘자폐’ 소리를 들을 만큼 침묵해 오다 느닷없이 ‘용감한 개혁’을 외치고 나오니 황당하다는 거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2008년 대표 취임 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이 민주당 정체성에 위배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며 답답해했다. 이제 와서는 재협상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자동차업계는 한미 FTA 지지 광고를 냈는데 그는 자동차업계의 불이익을 걱정한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통(嫡統)을 자처하며 그의 최대 치적인 한미 FTA를 떠받들다가 진보정당과의 짝짓기를 앞두고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렇게 하자고는 못했을 것”이라며 표변했다.

언젠가 이 사람들이 상황 반전을 노리고 ‘무릎팍 도사’나 ‘강심장’에 나가서 은근슬쩍 이렇게 개그를 하며 눙치고 넘어가려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여기 못 올 뻔했어요. 온갖 맹수들이 ‘고기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며 위협하는 거예요. 마침 내가 돼지고기 통(포크배럴)을 짊어지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나 여기 못 올 뻔했어요.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우리 자동차업계가 FTA를 얼마나 싫어하면 그렇게 온갖 차들로 내 앞을 가로막았겠어요….”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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