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이진삼 장군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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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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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수 논설위원
육정수 논설위원
며칠 전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의 무용담이 신문에 실렸다. 육군 대위 시절인 1967년 황해도 지역에 세 차례 침투해 33명의 북한 군인을 사살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북한 무장공비 출신 4명을 훈련시켜 함께 갔다고 한다. 생명을 걸고 적지(敵地)에 뛰어들어 위험한 작전을 감행했다면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내세운 ‘야전형 전투형 군인’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北침투 33명 사살’ 과시하듯 공개

1960년대 후반 북한은 끊임없이 무장공비를 남파해 우리 안보를 위협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노린 청와대기습사건(1968년 1·21사태)과 삼척·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 11월 2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소탕작전 과정에서 많은 장병과 경찰, 민간인이 희생됐다. 그 무렵 방첩부대(기무사령부 전신) 청년장교였던 이 의원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보복작전을 자원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참모보다는 야전 지휘관을 주로 지냈다. 전방 보병사단에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을 거쳐 사격지도단장 공수특전여단장 사단장 정보사령관 군단장 육군참모차장 1군사령관을 역임한 뒤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이처럼 야전 외길을 걸은 군인도 드물다. 위관(尉官) 시절에는 무공(武功)이 뛰어난 장교에게 주는 화랑무공훈장을 세 차례나 받았다.

그렇지만 찜찜하다. 그가 밝힌 ‘북한에 침투해 33명 사살’을 정확한 사실로 알고 있는 군 원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의원의 육사 1년 선배(14기)는 “대위 시절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예비역 장성도 있다. 청년장교 시절 가깝게 지냈다는 어느 육사 동기생(15기)은 “사실이라면 자랑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벌써 발설했지 지금까지 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의 주장이 맞는다면 사실상의 군사기밀로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사항이다.

‘이진삼 무공’ 기사를 읽으면서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가 궁금했는데,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국회 국방위원회 간담회에서 이 의원이 국방장관에게 “내가 이북에 세 번 들어가 보복 작전한 걸 알고 있느냐”고 묻고는 스스로 공개했다. 그는 “후배 군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의원의 발설은 부적절했다. 군 원로들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경솔하게 입을 연 것”이라고 비판했다. 군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북한에 ‘남조선 군대의 호전성’을 선전할 재료를 제공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세력에 의해 위해(危害)를 당할 우려도 없지 않다. 국민이 꼭 알아야 할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군 내부에서 암암리에 후배 군인들에게 전해지는 것만으로도 명예가 될 수 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정보기관의 구호는 그도 지켜야 할 본분이다.

軍원로들은 “부적절한 언행” 비판

예비역 장성들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든 ‘장군님’으로 계속 불리기를 좋아한다. 특별한 카리스마와 명예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장군에게는 남다른 희생정신과 애국심, 책임감, 리더십이 요청된다. 이 의원은 육군 총수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국회 국방위원이다. 누구보다도 국가안보를 생각하고 후배 장군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원로다.

이 의원은 작년 3월 천안함 폭침 직후에도 ‘내부 장병에 의한 폭탄 설치’ 가능성을 제기해 경솔하다는 비난을 샀다. 4월에는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에 배석한 장성들이 인식표(군번줄)를 목에 걸지 않았다고 호통 친 일이 있다. 군 기강을 질타한 것이지만 이 의원도 스스로 똑같은 잣대로 ‘무공’ 발언을 자성할 필요가 있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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