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차 광화문에 왔다가 청계천을 지나는데, 그 물길 위에 영롱한 빛의 우산, 선물상자, 음표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어디선가 캐럴도
들려온다. 매서운 바람 탓만은 아닌 무언가에 몸이 떨리며 소름이 살짝 돋는다. 아, 한 해가 또 갔구나. 성탄절이 왔네….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천안함 폭침부터 연평도 포격, 북의 불바다 위협 속에 치러진 사격훈련까지 그 으뜸은 역시 북과의 관계
악화였다. 세종시, 4대강, 예산안 처리과정의 충돌 등 정치적 갈등도 여전했다. 우리네 팍팍한 삶도 나아진 게 없는 가운데
게임중독자의 친모(親母) 살해부터 연일 이어지는 짐승 같은 성범죄까지 절망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도 많았다.
필자의 전공 탓일까? 국가안보로부터 개인 삶에 걸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따지고 보면 결국 소통의 장애 탓이었다는 판단이다.
소통은 물리적 강제, 협박, 사술에 의존하지 않고 대화, 설득, 진실에 기초한 상호작용이다. 동물적 본능적 일방적이 아닌 인간적
이성적 쌍방적 행위다. 이를 위해선 소통하려는 바(사고)와, 이를 표현하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표현이 사고를 과도하게 앞서갈
때 상대방의 말을 기계적으로 따라하는 반향어(echolalia) 장애가 온다. 역으로 표현이 사고를 드러내지 못하면
실어증(aphasia)이나 난독증(難讀症·dyslexia)이 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결여될 때 이른바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가
등장한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집안에 칩거하는 은둔형 외톨이다. 경우에 따라 3∼4년, 심할 경우 10년 이상을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한다.
집단지성 밀어낸 소통 병리현상
이러한 소통 병리현상은 사회적 차원에서도 존재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극한의 폐색(閉塞) 상태에 스스로를 가둔 채 야비한 공갈과 공격적 행위를 일삼는 북한의 행태는 영락없는 악성
히키코모리다. 정상적 소통능력을 상실한 동물적 상태로의 타락이다. 정도 차는 있지만 우리에게도 말 한마디 삐끗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곤욕을 치르거나 더 극단적인 일도 겪던 시절이 있었다. 그 폭력적 병영국가 상황에서 소통은 도서관 창틀에서 몸을
날리거나 몸에 시너를 붙고 자신을 불사르는 살신, 양심적 표현 한마디에 모든 걸 희생하는 언론인의 지사적 결기, 광장에서 제도적
폭력과 맨몸으로 부딪치는 투쟁을 의미했다. 다수의 사회성원들은 어쩔 수 없이 사회 및 타인들과 단절된 히키코모리 상태에
빠져들었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그리고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말처럼 삶의 미시적 영역에서 권력해체가 진전되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소통적 관계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처는 깊었다. 히키코모리의 뒤를 이은 건 또 다른
소통장애였다. 그 어떤 증거를 들이대도 명약관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입에 담지도 못하는 일은 난독증 내지 실어증 그 자체다.
천안함 진실논쟁, 타블로 학력논란, 세습비판을 둘러싼 진보진영의 내부갈등 등 사례는 부지기수다. 다른 한 축에선 최소한의
인식능력이나 분별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남의 말을 따라하는 반향어 증상이 기승을 부렸다. 개체적 이성이 마비된 의원들의 집단행위는 그
전형이다. 인터넷 마녀사냥의 광기는 또 어떤가. 최근 붐을 이루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한 이른바 소셜 소통행위 역시 많은
경우 집단지성에 앞서 군중의 무비판적 말 따라 하기 혐의가 짙다. 반사회적인 게임중독자, 성범죄자들 속에 히키코모리의 모습 또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 소통의 문제는 이처럼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이다. 진보건 보수건 일반인이건 식자건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러한 장애에서 비켜가지 못한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필자 스스로 올 한 해 소통의 질병들을 통째로 앓았다.
반향어 증상에 빠져 이런저런 말들에 휘둘리고 또 그것들을 옮겼다. 난독증 상태에서 소중한 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고, 가망 없는
병을 앓던 이에게 간절했음에도 실어증에 걸린 듯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다. 히키코모리로 틀어박힌 적도 허다하다.
진정한 소통과 함께 오는 평화
2010년 전 우리를 구원하러 왔던 이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폭력과 협박이 횡행하던 시대, 그는 사랑의 힘을 설파했다. 향락의
장이 아닌 천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임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었다. 그는 위대한 소통자였다.
아름다운
청계천의 성탄 장식들 앞에 필자는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소망했다.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남과 북, 여(與)와 야(野), 너와
나 간에 야멸치게 상처 주고 상처 입는 일 없이 서로 보듬는 날이 되기를.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에 미소와 눈물이
흐르는 오늘이 되기를. 이 땅 위에 진정한 소통 그리고 평화가 함께하기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