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요리를 만들고 또 주기적으로 그 맛을 글로 쓰는 일이 직업이다 보니 일상의 중심은 항상 세치 혀에 집중된다. 하루 이틀 쉬는 날이 생겨서 모처럼 여행을 떠나면 그 끝은 항상 맛 여행으로 맺어지며, 영화 한 편을 보면 주인공의 대사보다 그와 그녀가 마주했던 식탁 위 메뉴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최근에 본 영화 ‘무적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화 속 주연급 캐릭터 가운데 두 명은 탈북자 형제라는 설정인데, 형이 먼저 남으로 가면서 남은 어머니와 남동생이 모진 고생을 하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후, 자신도 탈북에 성공한 동생은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하나뿐인 형이었다는 원망으로 가득하다. 한국에 정착한 형제가 지척에 살게 되었음에도 얼굴을 마주 하는 일 없이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동네 밥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형제의 사연을 다 아는 밥집 주인장의 애정 어린 호통에 못 이겨 겸상을 한다. 이때 등장하는 메뉴가 내 눈을 사로잡았으니 바로 국밥이다.
형에 대한 원망, 막상 몇 년 만에 가까이 대면하여 느껴지는 서로에 대한 살가움,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 형의 표정은 묵묵히 국밥을 먹는 장면에서 뜨끈하게 버무려진다. 주인장 호통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겸상을 했다는 듯 서로 말 한마디, 시선 한 자락 맺지 않고 각자의 국밥을 먹지만 우리 음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개인적이지 않다. 상 하나의 중간에 선을 턱 그어두고 먹을 수 없는 음식, 반찬 한 그릇을 나눠 먹는 음식, 개인 접시에 덜어 먹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음식, 국밥에는 깍두기를 꼭 한 개씩 넣어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우리 음식이다. 맵거나 뜨겁거나 맛있어서 먹다가 땀을 흘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음식이 한국 음식이다.
탈북형제 마음 녹인 국밥 한 그릇
만약 몇 년 만에 형제가 마주하고 먹는 음식이 생선초밥이나 햄버거였다면 어땠을까. 우리 음식처럼 서로의 수저가 닿을 일 없이 일인분씩 딱딱 나눠 나오는 다른 문화권의 음식이었다면 어땠을까 말이다. 서로가 없다는 듯 밥을 먹지만 동생이 깍두기를 집을 때 형은 먹던 밥을 잠깐 멈춰 기다리고 형이 김치를 집을 때에는 동생이 잠깐 멈칫해야 하는, 그래서 서로의 식사 리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 음식이다. 특히 이마에 땀이 흐르고 배 속이 뜨끈해지면서 마음까지 너그러워지게 만드는 국밥은 무수한 이유와 변명을 넘어설 수 있게 우리를 옛날로 돌려놓는 ‘솔 푸드’인 것이다.
조부모님과 아버지의 고향이 모두 이북인 우리 집의 ‘솔 푸드’로는 평양냉면이나 불고기 등 몇 가지 메뉴가 있지만 명절에는 역시 빈대떡이다. 그것도 맏며느리인 울 엄마가 시집온 후 37년간 부친 빈대떡이다. 빈대떡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입맛에 맞춰 만들어진 레시피다. 고기는 조금만, 고사리는 듬뿍 넣고 다른 재료가 일절 섞이지 않은 녹두 본연의 감촉으로 맛을 낸 빈대떡이 ‘우리 집 표’이고 ‘울 엄마 표’다.
엄마는 빈대떡 반죽을 훌훌하게 만들어 묽게 부친다. 번철에 반죽을 떠 올리면 묽은 반죽이라 부치는 데에 여간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데, 그래야만 겉은 아삭하고 속은 촉촉한 맛이 난다고 엄마는 고집한다. 이 손맛을 아직 전수받지 못한 나는 “요리하는 사람이오”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풋내기 주부에 불과하다. 명절이나 집안 어르신 생신이면 엄마는 늘 빈대떡을 부쳤다. 할아버지 살아계셨을 적에는 한 점 잡수실 때마다 ‘음, 음’ 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던 음식을 할아버지 안 계신 식탁에 모두가 둘러앉아 여전히 먹는다.
빈대떡 지지는 기름 냄새가 집 안에 돌면 식탁에 왠지 할아버지가 앉아 계실 듯한 느낌이 든다. 반주 한 잔을 먼저 두고 나물이나 김치를 안주 삼아 빈대떡을 기다리시던 할아버지. “재은 에미야, 거 좀 날래 가져오라”고 장난 삼아 큰며느리를 놀리시던 할아버지는 때마다 엄마가 부쳐내는 빈대떡 한 조각에 여전히 산 사람처럼 연중에도 몇 번이고 가족 앞에 나타난다. 빈대떡에 곁들여지는 시원한 이북식 김치는 또 어떤가. 한 보시기 담아 놓고 온 가족이 번갈아 쭉쭉 찢어 먹는 우리 김치는 큰 잎 하나를 두고 쭉 찢어서 빈대떡에 싸 먹고, 빈대떡을 다 삼킨 다음 시원한 맛으로 그냥 먹고 하는 것이 제 맛이다.
빈대떡에 담긴 할아버지의 추억
가족 누구도 서로의 젓가락이 닿았던 김치라 하여 청결하지 않다거나 따로 담아 달라고 유난 떨지 않는다.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 내 살 같은 이들이 바로 가족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가족의 소통은 ‘밥’으로 이뤄진다. 몇 년을 서로에 대한 오해와 원망으로 보낸 형제가 국밥 한 그릇으로 그리움을 기억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뜨거운 빈대떡과 차가운 김치의 감촉으로 명절마다 가족을 찾아온다. 가족이 모여 앉아 밥 먹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물 말아 한 술 뜨는 소소한 밥상이라도 둘러앉아 함께 먹는 노력을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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