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교사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을 보고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다. 또 한편으로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도 있다. 저러면 안 되지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나쁜 점을 따라하는 부작용을 말한다. 바람직하기로 말하면 앞의 것을 취해야 할 테지만 우리네 현실에선 뒤의 것을 따르는 예가 제법 많다.
요즘 정치는 당과 계파로 나뉘고, 좌우와 보수·진보의 구분은 필수가 된 듯하다. 게다가 구세대와 차세대가 다시 분리된다. 정당 간에 대치와 비방만 있고 협조와 인정은 없다. 파벌 간에는 제거와 배제에 치중할 뿐 포용과 상생이 부족하다. 이러한 모습은 반면교사의 기능보다는 따라하는 학습효과가 크다. 그래선지 이제는 시의회도 멱살잡이고 웬만한 이사회, 위원회도 고함치기가 팽배하다. 실제 잘 따져보면 서로 견해차가 별로 없을 때도 있다. 그래도 일단 다투고 본다. 하다못해 TV 드라마를 보아도 소리 지르고 싸우는 내용이 많다. 시속 20km로 운행하다 추돌해도 앞차 운전자는 일단 뒷목부터 잡고 내린다. 우리 동네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 싶으면 이웃들은 모여서 소송부터 논의한다. 더구나, 6·2지방선거 이후에는 교육과 입법, 국책사업이나 지방 행정뿐만 아니라 연예인의 TV 출연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화합으로 가는 바람직한 과정으로 보기에는 피곤한 낭비가 너무 많다.
또한 근래 들어 사회에는 웬 단체와 모임이 그리도 많은지 놀랄 지경이다. 성향은 달라도 모두들 나라걱정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그런데 특이한 건 걱정은 많고 분석은 넘치는데 실제 나가 봉사하거나 사회부조활동을 하겠다는 단체는 적다. 포럼과 세미나는 넘치지만 행동은 약하다. 정치인들도 선거 때면 시장에도 나가고 장애인시설도 방문하지만 평소에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구호나 성명을 외치는 외에 달리 일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다들 나라걱정은 많은데 나라사랑의 실천은 적다. 민주 활동이 투쟁의 역사였을 뿐 살아 있는 자치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보다는 자리가 목적이기 때문일까.
너무 익숙해진 편가르기
선구적 여성운동가인 한 선배가 1970년대 초 유학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어느 여름날 할머니들이 공원 벤치에 모여 앉아 털장갑, 털양말을 짜고 있었단다. 그 선배는 손자·손녀를 위한 것인가 본데 웬 여름날에 털장갑인가 싶어 다가가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들은 당신 손자·손녀를 위한 게 아니라 제3세계 아이들을 위해 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이것이 바로 선진 국민이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계기로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요즘 선진국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논의가 분분하다. 과거와는 달리 경제적 지표만으로 판정될 수 없고 행복함도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법 힘을 얻는다. 물질적으로야 1970, 80년대보다 획기적으로 풍요해져서 훨씬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상대적 빈곤감에서 비롯된 우울과 소외감 그리고 투쟁의식이 제법 크다. 그래선지 유독 분쟁도 많고 자살도 많다. 사실 선진국이라고 해도 미국은 치료비 아까워 병원도 못 가고, 인건비 무서워 가전제품 수리도 못한다. 일본은 음식값 아까워 많이 못 먹는다. 영국은 난방비 무서워 오슬오슬 겨울을 난다. 독일은 규칙과 질서가 까다로워 살기가 불편하다. 말이 선진국이지 실제 생활은 우리가 훨씬 풍성하고도 편리한 점이 많다. 너무 탓하고 걱정할 것만은 아니다.
걱정보다 애정을 표현하자면 우선해야 할 것이 다른 편에 서보는 일, 다른 입장을 고려해 보는 일이다. 불만과 불평과 울분은 결국 소통부재의 일방통행문화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보고 말하면 상대의 불편함을 못 느끼고 왜 저러지 하는 걱정만 든다. 이는 특히나 성공한 이들, 출세한 이들, 혹은 연장자들의 흔한 오류로 지적된다.
세대-입장 넘어 소통해야
요즘 중년들 사이에선 색소폰 배우기가 열풍이다. 물론 멋진 취미생활이다. 그런데 모임에서 사람들 모아놓고 한두 곡도 아니고 계속 신나서 연주해 댄다면 나머지 사람들에겐 고충일 수 있다. 자랑하고 싶은 유치함과 남의 사정 모르는 눈치 없음의 백미다. 자기 얘기를 늘어놓을 때 다른 이들이 가만있다고 해서 모두 동조하는 게 아니다. 자란 환경과 문화는 다르지만 젊은이들도 그들대로의 생각이 있다. 그들은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참여연대의 서한에 대해 왜 외국에 그것을 보냈느냐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 편지의 영어 구사가 세련되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한다. 에너지 절약도 좋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의 교실 온도를 강제하는 경직된 상명하달을 싫어한다. 우리 자라던 시절의 잣대로 가르치려 들면 그냥 싫다는 역효과만 커지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어른이 불만스러워도 참고 견뎠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나라사랑은 다른 의견 들어보기, 다른 계파 아우르기로 시작했으면 하는 제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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