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강은교]부러진 팔에게 배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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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아저씨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아주 느릿느릿 이북 사투리를 구사했다. 바람과 햇빛에 타서 거의 검붉은, 마치 울퉁불퉁한 산맥처럼 주름살이 깊게 파인 얼굴, 우락부락한,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마디가 굵은 손. 몽골의 어느 가파른 언덕에서 차를 옮겨 타는 중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끌며 봉고차라든가, 꽤 턱이 높은 차로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한 팔에 깁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몽골서 들은 “첸첸히, 첸첸히”

그는 나의 깁스하지 않은 손을 잡고 마치 나를 춤추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천천히 차로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묘한 억양의 이북 사투리로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첸첸히, 첸첸히…첸첸히.”

여름이 다가오니까 몽골 초원의 들꽃과 함께 카자흐스탄 아저씨의 이북 사투리가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깁스를 한 채 그 초원에 던져져 있던 나의, 영 초원과는 어울리지 않던 모습이. 웬 초원 타령이시냐고? 왜 빨리 본론을 말씀하시지 않느냐고?

그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나는 꽤 자주 넘어졌었다. 아마도 그해는 넘어짐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초여름 어느 날, 건널목을 막 건너던 참이었다. 아스팔트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때 동행이던 이의, 휘적휘적 거니는 걸음을 따라 나는 열심히, 아니 거의 뛰듯이 걸었다. 휘적휘적 하는 듯했지만 등산 전문가인 그의 걸음은 무척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늘 말썽인 왼발이 건널목의 동그란 턱에 걸려 나는 나동그라졌다. 동행인은 벌써 길을 다 건너고 있었다. 얼른 일어났으나 팔이 무척 아팠다. 조금 있으려니 손목이 보라색으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동행하던 이가 잘 아는 병원으로 직행했다. X선을 찍은 결과 손목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의논 끝에 얼른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수술한 부위가 빨리 낫도록 하기 위해서는 입원하라는 의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마침 여행을 가기로 하고 여권도 받아놓은 상태였으므로 모두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내심 여행을 포기하기로 생각했었으나 행선지가 늘 가보고 싶던 몽골이었으므로 여행을 같이 갈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깁스를 한 채 여행을 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말을 탄다거나 낙타를 탄다거나 하는 일은 그만두고 지상에서 가장 별이 많은 그곳의 사막을, 재수 좋으면 몽골의 깨끗한 무지개만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려고 했을 때, 나는 한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첸첸히, 첸첸히.” 그것이 카자흐스탄 아저씨의 낮은 중얼거림임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느릴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세상

하긴 ‘천천히’는 이제 너무나 평범한, 그러기에 누구나 소리 높여 외치는 진리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카자흐스탄 아저씨의 중얼거림은 순간 나를 깜짝 놀라게 했으니 어쩐 일일까? 오늘 이 시대의 삶터는 오랫동안 우리의 미덕으로 자리 잡아 온 그것을 깊이 잊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필수품처럼 된 자동차는 아무리 ‘천천히’ 구호를 외쳐대도 우리를 서두르게 하며 기차의 속도도 자꾸 빨라진다. 조선시대 양반처럼 “이리 오너라. 거기 멈추어라”라고 소리치며 서 있기만 해서는 삶이라는 기차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서두른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즉 우리의 마음이 또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우리의 감정습관이 순식간에 행동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러한 순간에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 마음의 속도가 늦춰지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좀 더 명료하게 볼 수 있고, 무의식적인 반응 쪽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타라 베넷 골먼 ‘감정의 연금술’)

글 끝에 타라 베넷 골먼은 ‘낙하산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속도를 늦춰 천천히 초원에 내려앉는 낙하산은 초원의 들꽃은 물론이고 모래밭을 빠르게 달리는 벌레 따위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제트 비행기를 타고서는 결코 보이지 않을 지상의 자그만 것을. 그리고 또 서두름은 ‘집착 또는 탐욕’이라는 파트너를 항상 데리고 올 것이다. 얼른 그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빠른 이룸’은 곳곳에서 이 지구의 거주민의 삶을 ‘과시 또는 전시’로 만들 것이다. 처음 보는 대리석으로 치장한 도시의 계단, 진주 브로치같이 우아하게 반짝이는 그러나 차디찬 유리의 벽, 응접실을 지고 다니는, 검게 틴팅한 탓에 안의 사람이 결코 보이지 않는, 값비싼 승용차.

이 사회가 몽골의 초원처럼 그렇게 천천히 들꽃을 안고 가는 길을 가지기를 빈다. 그 길을 들꽃 향기를 맡으며 ‘첸첸히, 첸첸히’ 촌스럽게 걸어가고 싶다. 고독도, 소외도, 장애도, 실패도 편안해지는, 느긋한 광활함에 가슴을 내밀고.

강은교 시인·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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