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로 태어난다는 건 극단적인 행복이거나 불행이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조선 영조도 연잉군 시절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경종이 좀 더 건강했거나 왕자를 봤다면 목숨을 지키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안을 이기지 못한 연잉군은 관우의 영(靈)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 중 하나인 동묘를 찾아 점을 치기도 했다. 관제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세워졌다. 관우는 중국에서 무장들의 우상이고, 출세의 신이며, 상인들의 수호신이었다. 모든 계층에서 추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전후 조선에서도 삼국지가 유행하고, 임란 후 상업도 발전하면서 관제묘의 인기가 높아졌다.
연잉군은 더욱이 삼국지의 팬이었다. 왕이 된 뒤 관제묘 근처를 지날 때면 반드시 들러 참배했고, 묘의 상태와 심지어 관우상에 입혀 놓은 의복까지 신경 썼다. 신하들은 영조의 관제묘 참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관우는 장수이니 왕보다 격이 낮다. 영조가 살아 있는 관우를 만난다고 해도 관우가 영조에게 예우해야 하는데, 영조가 관제묘에 하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설 ‘임진록’에 나오는 설정, 즉 명나라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고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며, 관우가 신병을 이끌고 임진란에 참전해 조선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까지 사실처럼 인용하며 관우 참배를 정당화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이후 왕들의 관제묘 참배나 관우 칭송, 소설과 역사의 혼용이 당연하게 이뤄졌다. 조선시대에 신하들은 왕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 명분에 어긋나는 행동에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런데도 왕이 우기니 버젓이 드라마가 역사가 됐다. 이래서 권력자는 늘 멀리 보고 행동을 삼갈 줄 알아야 한다. ‘강하게 나가니 되더라’는 생각처럼 위험한 착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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