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좀 두려웠다. 15일 아프가니스탄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그곳에서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나름대로 대응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속절없이 동이 터 왔다. 퀭한 눈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상공에서 바라본 아프간의 산하는 온통 황토빛이었다. 산과 들이 모두 생명의 기운은 없어 보였다. 물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돼 보였다. 이렇게 척박한 나라에서 왜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것도 1979년 옛 소련의 침공 이후 30년이 넘도록….
미군이 주둔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바그람 공군기지도 그렇게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중국 황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모래바람이 눈을 뜨면서부터 불어댔다. 4중, 5중의 경비체제를 갖췄지만 기지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적의 공격에 늘 긴장 상태였다. 기지 밖으로 나갈라치면 지뢰를 포함한 폭발물로부터 안전한 특수장갑차를 타고도 방탄조끼에 철모를 눌러써야 했다. 미군의 엄호 없이 떠난 바그람에서 카불까지 왕복 120km는 적어도 내게는 ‘가장 위험한’ 도로였다.
하지만 이곳에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에게서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서로에게 마구 전파되는 행복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한국 병원에서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간호사들의 얼굴에는 전장에서 일한다는 긴장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10년은 씻지 않은 듯 보이는 아프간인들을 대할 때건 피부질환이 심해져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구멍이 귀에 생긴 환자를 돌볼 때건 입가에는 늘 미소가 있었다.
카불의 한국대사관이나 한국 지방재건팀(PRT) 운영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사명감이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하나하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지 못한 아프간의 미래에 작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에 힘든 줄도 몰랐다. 어깨에 달린 태극마크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는 몸짓, 숙소에 걸린 태극기의 주름을 정성스럽게 펴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1년씩, 2년씩 사사로운 가족애를 잠시 제쳐두고 준비해 온 PRT가 7월이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바그람 기지를 빠져나오는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말을 붙여 왔다. 탈레반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칸다하르 주 캐나다 PRT 대표인 제스 더턴 씨였다. 21개 아프간 PRT 참가국 모두가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성공을 기원했다. 한국 PRT는 많은 세계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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