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이창호 9단의 제2의 기업(起業)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4일 03시 00분


이달 중순 이창호 9단은 중국 상하이에서 낭보를 전했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단체전인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홀로 3연승을 거두며 한국팀에 우승을 안겼다. 대회 전만 해도 그의 3연승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지난달 LG배에서 쿵제 9단에게 패하면서 9연속 세계대회 준우승이란 불명예 기록을 추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주위에서 ‘슬럼프’라고 할 때마다 ‘나는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 그의 불가사의한 힘이 이번 농심배에서도 또 한 번 발휘됐다.

농심배를 지켜본 프로기사들은 “이 9단의 바둑이 확실히 변했다. 이제 이 변화가 이 9단의 몸에 맞게 정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 그는 조훈현 9단을 꺾고 국수위를 쟁취하며 ‘이창호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15세 국수는 당시 ‘프로기사의 전성기는 20대부터’라는 통념을 깨버렸다. 그의 1인자 등극은 바둑계의 패러다임도 바꿨다. 포석 감각, 수읽기, 전투력 등이 주요 키워드였던 바둑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끝내기를 전면에 부각했다. 끝내기는 바둑을 마무리하는 단순작업이라는 관념을 뒤집고 승부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블루오션으로 개발한 것이다.

끝내기라는 ‘캐시 카우’를 갖게 된 이 9단의 바둑은 초반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화려한 행마와 현란한 전투보다 속이 꽉 찬 내실 경영을 화두로 삼았다. ‘돌부처’ ‘신산(神算)’ ‘기다림의 미학’ 같은 수식어들은 그의 바둑경영을 대표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계산 능력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 9단의 세례를 받은 ‘이창호 키드’들의 끝내기 실력이 이 9단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끝내기는 ‘레드오션’으로 변해갔다.

이 9단의 성적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7년 이 9단은 54승 31패(승률 63.5%)로 입단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입단 후 연평균 승률이 75%이던 그가 60%대를 기록한 건 충격이었다. 그의 정신적 후견인이었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는 악재도 겹쳤다. “종반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 그의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좌절 대신 변신으로 그를 이끌었다. 부실 사업(끝내기)을 과감히 정리하고 그동안 묵혀뒀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적극적 선제 공세였다.

김성룡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이 9단이 전투력에서 다른 정상급 기사보다 결코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진 그렇게 둘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느리지만 확고하게 진행된 이 9단의 새 사업 진출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이젠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팬들은 이 9단의 바둑에서 ‘화끈한’ ‘도발적인’이라는 용어를 더욱 자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9단은 23일 53기 국수전 우승 후 “처음엔 (변신이) 거북했지만 최근엔 공격적으로 두는 게 정리가 더 잘된다”고 말했다.

이 9단을 잘 아는 기사들은 이 9단의 장점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와 누구보다도 강한 승부욕을 꼽는다. 바둑계에서 이룰 만큼 이뤘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6일 전남 영암에서 열린 국수전 결승 1국이 끝난 뒤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누군가와 휴대전화 문자를 주고받으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요즘 사귀고 있는 열한 살 연하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바둑과 인생에서 이 9단은 ‘제2의 기업(起業)’을 시작했다.

서정보 교육복지부 차장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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