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감사를 잘 뽑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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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증권 보험사 같은 금융회사의 감사는 연봉이 대략 2억∼4억 원 선이다. 형편이 넉넉한 회사는 5억 원이 훨씬 넘는 보수를 주기도 한다. 업무와 관련해 법인카드로 쓰는 지출은 물론 별개다.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 조건이면 민간 부문에서 실력을 쌓은 인재들이 탐을 낼 법도 한데 이들이 금융회사 감사로 변신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금융감독원 퇴직 간부들이 ‘재취업’을 위해 줄줄이 대기한 판에 섣불리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승진할 가망이 없는 금감원 고참 국장들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안 되면 감사라도 하지”라는 자조(自嘲)성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몇 개월 지나 이 간부는 ‘○○ 감사’라는 새 명함을 들고 나타난다.

금융회사들은 금감원이 찍어주는 인물을 군소리 없이 받아야 했다. 어떤 최고경영자(CEO)는 “금감원 출신을 받기는 받겠는데, 누구를 받을지는 우리가 정하도록 해달라”고 해 관철시켰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인데도 주변에서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웠다. 2004년 이후 민간 금융회사의 감사 자리를 차지한 금감원 출신은 90명이 넘는다.

상근직인 감사와 단순 비교할 성격은 아니지만 금융회사의 사외이사들도 근무시간 대비 보수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KB금융지주 회장 선출 과정에서 이 회사 사외이사들의 보수가 연간 6000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다른 금융지주회사나 은행의 사외이사도 이만큼은 아니어도 월 한두 차례의 회의에 참석하는 대가치고는 많은 돈을 받는다.

금융회사의 감사와 사외이사는 고객이 맡긴 돈을 다루는 금융업의 특성상 일정 부분 공적인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CEO와 집행부의 독단 경영을 견제하는 고유의 임무는 물론 확장경영이 자산구조의 건전성에 미칠 영향을 살펴야 하고 고객이 피해를 볼 소지는 없는지도 따져야 한다. 한 회사의 잘못된 결정이 전체 금융시스템을 교란할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둬야 한다. 금융시장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1차 안전판인 셈이다.

전문성을 갖췄다는 감사와 사외이사들이 곳곳에 포진했지만 부실이 문제가 되고 위기가 터졌을 때 이들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CEO는 나중에라도 책임을 졌지만 감사나 사외이사가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잘못을 인정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은행의 투자손실로 황영기 전 회장이 물러나고 해당 임원이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의 감사, 그때의 사외이사는 제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금감원이 수십 년간 지켜온 기득권인 감사 선임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나선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낙하산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감사공모제를 도입하고 금융회사에 들어간 전직 간부의 명단을 작성해 현직 후배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집중 감찰한다는 게 골자다. 사외이사제도도 재임 기간에 상한선을 두고 선출 방식을 바꾸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김종창 금감원장이 특단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소신껏 결정해도 좋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없다면 금융회사들은 공모를 하더라도 당국의 기류를 헤아려 금감원 출신을 낙점하려 할 것이다. 민간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지만 ‘감사는 금감원 퇴직자 몫’이라는 고정관념부터 바꿔 나가야 한다. 독립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 감사와 사외이사를 뽑는 것은 한국 금융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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