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상운]‘乙’에 서명 강요하는 土公

  • 입력 2008년 7월 9일 03시 00분


지난달 30일 건설업체 A사는 한국토지공사의 요청으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토공 본사에 영업 담당직원을 보냈다.

이 직원에게 토공 담당자는 대뜸 문서를 건네며, 직원 20명 이상에게 서명을 받아 달라고 요구했다.

굵은 글씨로 ‘토공 주공 통합 반대한다’라는 제목이 붙여진 문서에는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서명 등을 적는 20여 개의 빈칸이 있었다.

토공 담당자는 “반대 서명을 받을 때 회사 이름은 쓰지 말고, 개인 자격으로 작성한 것처럼 해 달라”는 은밀한 요청도 덧붙였다.

며칠 뒤 A사는 문서에 본사 사업본부 직원 50명의 서명을 받아 토공에 보내줬다.

A사 관계자는 “일부 대형 건설사는 현장 직원까지 동원해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토공의 발주로 수도권 택지개발지구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건설업체 B사의 현장 사무실에는 토공 직원이 지난달 중순 직접 서류를 들고 왔다.

건설업체 관계자는 “토공이 우리 생각과는 상관없이 반대 서명 인원을 강제 할당했다”며 “건설업체들은 사실상 토공과 주공의 통합에 관심이 없지만, ‘을’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협조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토공은 토목공사 분야에서 건설업체의 최대 고객이어서 업체들은 공사 측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토공의 협력업체가 수천 개에 달해 반대 서명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도 최소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정부는 공공부문 개혁의 일환으로 신도시나 택지개발 사업에서 기능이 중복돼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대한주택공사와 토공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인원이나 조직 규모가 주공에 훨씬 못 미치는 토공은 주공 위주로 흡수 합병될 것을 우려해 통합에 반대해 왔다.

토공 노조는 지난달 정부과천청사에 있는 국토해양부와 서울 광화문에서 ‘통합 반대 1인 시위’를 벌이고, 일간지에 관련 광고를 싣기도 했다.

2일 취임한 이종상 신임 토공 사장은 취임식에서 “토공의 설립 목적과 임무에 충실할 때 단독 존립 내지 후(後) 통합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을’의 위치에 있는 건설업체에 공사를 발주하는 토공 직원들이 팔을 비틀 듯 통합 반대 서명을 받아내는 것이 과연 임무에 충실한 것인지 묻고 싶다.

김상운 사회부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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