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영미씨 미술사 강의 "재미있네요"

  • 입력 2000년 8월 1일 18시 27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여류시인 최영미씨(39)가 ‘서양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지하1층. 이날의 주제는 매너리즘과 바로크 시대 미술.

“난 고통이 너무 커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할 만큼 감미로움을 느꼈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화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法悅)’을 보면서 시인은 불경스럽게도 섹스에서 오르가슴의 절정에 이른 여인의 음성을 듣는다. 화살을 맞으면서 천상의 빛속에 잠겨있는 순교자 성 테레사의 반쯤 열린 입에서 매너리즘 이후 세속적이 돼가는 종교화의 ‘억제된 외설성’을 잡아낸 것이다.

루벤스를 싫어하고 렘브란트를 사랑하는 시인은 종종 일부러 객관성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은 어린 시절 봤던 만화영화 ‘플란더스의 개’의 주인공 소년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고 그 앞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작품”이라며 늘 품어왔던 궁금증 하나를 풀어주더니 “이게 그 앞에서 죽을 정도의 작품인가”라며 투덜된다.

루벤스의 작품 슬라이드 필름은 달랑 3장,렘브란트의 필름은 무려 14장을 준비해온 시인의 ‘의도된 편애’에서 강의를 듣는 이들은 권력에 영합하며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고 간 루벤스와 부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세상과의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렘브란트의 대조적인 인생을 알게 된다.

미술사 강의엔 으레 교양 좀 쌓으려는 유한(有閑)마담들만 북적거릴 줄 알았는데 50명으로 수강인원이 제한된 최씨의 강의에 30,40대 남성들이 10명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강의를 듣는다. 6년간 전문의로 있다 현재는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의 금융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는 정인철씨(37)은 “평소 문학이나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아하는 작가가 미술사 강의를 한다기에 참석했다”며 “시인이 화가에 대해 애증을 드러내는 부분에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정씨외에도 부인 자녀 등과 함께 강의를 듣는 아빠, 출판사의 기획담당자, 화가, 신문사 논설위원 등 다양한 남성들이 강의를 듣는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배운 미술사학을 살려 강의를 맡게된 최씨는 “한여름에, 그것도 밤 늦은 시간까지 미술사를 공부한다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보고 미술에 대한 갈증이 큰 것 같아 놀랐다”고 말했다. 처음엔 반신반의(半信半疑)했던 강좌가 큰 인기를 얻자 최씨는 가을쯤 한번 더 강의를 계획하고 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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