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인권 한뜻… 동아일보 창간의 뿌리는 3·1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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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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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계승한 민족언론 98년

동아일보는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망을 품에 안고 민족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창간했다. 동아일보는 1972년 강원 횡성군 횡성읍 횡성군청 뒤편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는 등 1960년대부터 전국의 유적지 조사를 통해 기념비 건립 운동에 나섰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망을 품에 안고 민족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창간했다. 동아일보는 1972년 강원 횡성군 횡성읍 횡성군청 뒤편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는 등 1960년대부터 전국의 유적지 조사를 통해 기념비 건립 운동에 나섰다. 동아일보DB

“거친 힘에 바탕한 침략주의 제국주의는 권리를 옹호하는 평화주의와 정의에 기초한 인도주의로 돌아서려 한다. … 돌아보건대 국권을 상실한 지 10년, 조선 민중은 한바탕 악몽을 꾼 듯하다.”(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사)

“다른 민족에게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을 겪은 지 오늘로써 10년을 넘어섰다. … 힘의 시대는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온다. …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로운 문명의 서광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한다.”(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의 창간은 1919년 거족적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도 흐름을 같이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기미독립선언서와 동아일보 창간호 사시(社是) ‘민주주의를 지지함’,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한 임시헌장(헌법)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망을 품에 안고 민족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창간했다. 창간호 1면(②)에 실린 창간사의 3대 사시(社是)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는 기미독립선언서(①)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망을 품에 안고 민족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창간했다. 창간호 1면(②)에 실린 창간사의 3대 사시(社是)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는 기미독립선언서(①)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동아일보DB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법, 동아일보 창간사가 모두 인류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 독립을 바라고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봉건주의적 왕정복고가 아닌 자유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근대적 민주주의 공화국을 지향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 4조는 ‘인민은 … 자유를 향유함’이다. 본보 창간사 역시 사시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개인의 인격에 바탕을 둔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 국내 정치에서는 자유주의요 … 사회생활에서는 평등주의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1920년 1월 6일 동아일보 발행 허가에 대한 일제의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 기록에는 “동아일보 발행 허가, 사장 김성수, 편집인 장덕수, 발행인 이상협의 한글신문(민족계) 발간”으로 돼 있다.

다른 민간 신문과 달리 유일하게 ‘민족진영’에 발행이 허가된 것임을 특기하고 있다. 설립자 김성수 선생은 1918년 12월 서울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고하 송진우, 훗날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되는 현상윤과 회동하며 독립운동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현상윤의 3·1운동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육당 최남선을 끌어들이고 천도교와 접촉하는 한편 평북 정주의 남강 이승훈을 서울로 오도록 해 기독교계와의 연합을 이끌어냈다. 김성수 선생은 이승훈에게 수천 원의 자금을 전해 기독교계의 규합에 쓰도록 했다.

창간 뒤 동아일보 초대 주간(주필)을 맡아 3·1운동 정신을 구체화한 창간사 ‘주지를 선명하노라’를 쓴 이는 설산 장덕수(1894∼1947)다. 장덕수는 중국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 망명 독립지사들과 함께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일본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추동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신한청년당은 3·1운동 뒤 임시정부 수립의 모든 실무를 맡았다”고 말했다.

고하 송진우는 3·1운동 주모자로 투옥된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1920년 10월 출감한 뒤 이듬해 3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2·8독립선언을 낭독한 근촌 백관수는 나중에 동아일보 사장이 돼 총독부의 강요에도 끝까지 폐간계에 도장을 찍지 않다가 종로경찰서에 수감된다. 경성의전 학생으로 학생층의 독립만세운동을 조직한 독립운동가 한위건도 1925∼28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정치부장을 지냈다.

동아일보는 창간 뒤 검거된 3·1운동 주역들의 공판을 집중 보도하고 고문당했다는 진술을 전하는 등 3·1운동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공판 시작을 알리며 민족대표 48인의 얼굴 사진을 모아 전면으로 다뤘을(1920년 7월 12일) 뿐만 아니라 옥중 근황도 ‘손병희 등 47인의 안부’(1920년 6월 12일) 등 기사로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3·1운동 2주년인 1921년 3월 1일에는 여전히 경성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의 사진과 함께 최남선 등이 가족에게 부친 편지를 실었다.

1926년에는 국제농민조합 본부가 3·1운동 7주년을 맞아 조선 농민들에게 보내온 축전을 게재했다가 2차 무기정간을 당하는 한편 주필 송진우가 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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