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창의적 콘텐츠… 자신과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나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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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윤태호가 말하는 창의력 기르는 법

‘창의적 콘텐츠는 어떻게 탄생할까?’ 윤태호 작가는 “창작은 최초의 것을 만드는 창조가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들의 말을 잘 축적해서 그 위에 자신의 말을 덧입혀 내놓는 것”이라고 답했다.
‘창의적 콘텐츠는 어떻게 탄생할까?’ 윤태호 작가는 “창작은 최초의 것을 만드는 창조가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들의 말을 잘 축적해서 그 위에 자신의 말을 덧입혀 내놓는 것”이라고 답했다.
“‘창의’라는 말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마세요. 이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 많거든요.”

21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만난 만화가 윤태호(45). 윤 작가는 창의적 인재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이렇게 답했다. ‘미생’, ‘이끼’ 등 인기 웹툰을 기획한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다소 의아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윤 작가가 제시하는 창의력을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종사이버대가 마련한 특강에서 웹툰 미생의 숨겨진 탄생 배경과 제작 과정을 공개한 윤 작가에게 그 비결을 들었다.

9시간 인터뷰 끝에 얻은 대사 2줄

“창작은 최초의 것을 만드는 창조가 아닙니다. 창작은 먼저 말한 사람들의 말을 잘 축적해서 그 위에 자신의 말을 덧입혀 내놓는 것입니다.”

창작에 대한 윤 작가의 소신이다.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까진 없었던 차별화된 소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진 않다는 것. 대표작 미생엔 창작에 대한 그의 소신이 잘 드러난다.

미생은 바둑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한 청년 ‘장그래’가 우여곡절 끝에 종합상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하면서 겪는 사회생활 이야기를 다룬 인기 웹툰. 온라인 누적조회 수 10억 건을 넘으며 ‘직장인 필독 웹툰’이라는 평을 받았다.

미생에는 기발하다 싶을 정도로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인기비결은 실제 회사원들의 고민과 애환을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내 공감을 얻은 점.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윤 작가는 3년 동안 철저한 조사를 했다.

회사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윤 작가는 기업에서 ‘부장’과 ‘과장’ 중 누가 지위가 높은지 모를 정도로 회사 생활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취재 초반에는 종합상사에 공식적으로 취재를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다행히 남자친구가 종합상사에 다니는 지인을 찾아 조사할 수 있었다. 연인이 데이트하는 데 몇 번을 쫓아다니며 ‘회사에서 노트북은 누가 가져다주는지’부터 ‘회사원의 인트라넷 첫 화면은 어떤지’ 등까지 회사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인터뷰했다.

“현장 취재를 한 9시간의 인터뷰 녹취를 풀면 A4용지 10페이지 이상이 나오지만 정작 대사가 되는 것은 두세 줄뿐이죠. 하지만 대사에 힘이 실리기 위해선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함’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돼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윤 작가)

스토리가 콘텐츠의 힘

윤 작가가 처음부터 스토리에 도착에 가까운 열정을 쏟은 건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그림만 잘 그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란 생각을 했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로도 스토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소설을 열심히 읽으면 스토리는 잘 쓰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산이었다.

빈약한 스토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준비한 작품이 한 출판사에서만 9번 퇴짜를 맞았다. 펜선을 입히는 데만 사흘 밤을 새웠을 정도로 그림만큼은 자신 있는 만화였다. 자존심이 상해 다른 출판사로 작품을 들고 가 어렵게 데뷔에 성공했다. 24세 때였다. 하지만 작품을 연재하는 4개월은 지옥 같았다.

윤 작가는 “데뷔작이 실린 잡지를 사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내 작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졌다. 내 만화는 그림에는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였는데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집에 있는 만화책을 모두 버리고 소설, 시나리오 등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 최인호의 시나리오 전집 등을 모두 베껴 썼다.

‘나에 대한 이해’가 작품에 영향

윤 작가는 독서법이 독특하다. 한 작가의 작품을 데뷔작부터 순서대로 다 읽어보면서 작품을 통해 그 작가의 변화 과정을 파악한다. 이문열 작가가 쓴 ‘사람의 아들’을 읽으면서 ‘이 작가는 20대에 이런 생각을 하며 작품을 썼구나’라고 알아가는 식이다. 이문열, 조정래 작가의 작품도 이 방식으로 모두 읽었다.

이 과정을 통해 결국 작품은 작가의 시선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밌는 작품을 만들려면 작가의 깊은 고민이 필요했다. 자신을 알아야 했다.

자신에 대한 고민의 시작은 ‘열등감’이었다. 어린 시절의 윤 작가는 옆집에서 차비를 빌려 학교에 갈 정도로 집이 가난했다. 선천적으로 약한 피부 탓에 개울가에 뛰어들어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어느 날 헌책방에 갔다가 ‘한 정신과 의사의 실존적 자기분석’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한 것이 계기였다. 자기분석을 위해서는 자신의 아버지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때부터 ‘아버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면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그전까지 아버지는 ‘자식 상투를 쥐고 좌지우지하는 분’이셨죠. 하지만 ‘젊은 나이에 아빠가 된 아버지가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가 이해됐어요. 울면서 일기를 썼죠.”(윤 작가)

인간의 운명적 속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사주, 관상,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고민과 욕망을 확인했다. 모두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비슷한 정서, 욕망, 갈등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과정은 윤 작가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이끼’, ‘미생’ 등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은 윤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창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견해와 관점이 있어야 해요. 자신에 대한 확신과 논리성이 없으면 혼란에 빠지기 쉽거든요.”(윤 작가)

글·사진=이비치 기자 ql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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