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간섭만 없으면 거장 감독들 우르르 쏟아진다

입력 2000-11-14 11:09수정 2009-09-2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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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7일 오전 4시, 요시무라 고자부로(吉村公三郞) 감독이 급성심부전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911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 89세입니다.

요시무라 고자부로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에 비해서는 덜 알려졌지만 비슷한 시기에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한 거장입니다. 특히 1950년의 <거짓 성장>(僞れる盛裝)과 1956년의 <밤의 강>(夜の河)은 대표작으로 일컬어집니다.

<거짓 성장>은 신도 가네토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신도 가네토는 미조구치 겐지에게 사사받은 제자입니다. <거짓 성장>은 미조구치 겐지의 대표작 <기온의 자매>에 대한 오마주로 쓴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시무라 고자부로에게 맡겨 영화로 만든 것이지요.

<밤의 강>은 요시무라 고자부로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컬러 영화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전속' 촬영 감독으로 유명하며, 올해 세상을 버린 미야카와 가즈오 촬영 감독이 아주 빼어난 컬러 영상을 보여줍니다. 고자부로 감독 덕분에 야마모토 후지코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고 합니다. 야마모토 후지코는 지극히 일본적인 마스크를 한 미인 배우로, 그 시대라면 스타가 안 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헌데, 일본 영화사를 돌이켜보면 참 희한한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는 '천재' 소리를 들어도 지나치지 않을 만한 감독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감독 말고도 요시무라 고자부로, 야마나카 사다오, 야마모토 가지로, 나루세 미키오 같은 대단한 감독들이 즐비하니까요.

야마나카 사다오의 <단게사젠요와 백만냥의 항아리>(35)는 시대극의 모범이자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29살 나이로 요절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잡았을 천재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부님'인 야마모토 가지로는 여러 가지 형식의 영화를 만든 인물로 유명합니다. 1938년에는 <도주로의 사랑>(藤十郞の戀) 같은 멜로드라마를 발표했는가 하면 1941년의 <말>(馬)처럼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도 필모그래피 속에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모든 작품이 별 세 개 이상씩 되는 수작이니 참으로 다재다능한 감독이라 할 만합니다.

나루세 미키오 역시 1951년의 <밥>(めし) 같은 걸작을 다수 발표한 거장입니다. 특히 전쟁 후에 걸작을 많이 발표해 세계적으로는 앞의 세 사람 못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이 시기에는 수많은 감독들이 활약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정한 시대에 몰려나왔다가 일정한 시대에 이르자 또 약속이나 한 듯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존 길렛이라는 영화평론가는 "일본 영화사를 돌아보면 거장들이 한꺼번에 배출되어 엄청난 작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다. 세계 영화사를 아무리 훑어 봐도 이런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한 평론가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아키라 감독 왈, "뭐 별 거 아니야" 했답니다. 그리고는 "스튜디오의 간섭 없이 자유로이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는 영화들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수작들로 완성될 수 있었지만, 영화에 마케팅 개념이 스며들기 시작하고부터는 점점 '장사치'들의 입김이 거세져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는 군요.

장사꾼들 입김만 없었다면 일본 영화계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거장으로 넘쳐 났을 거라는 말인데,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제 속이 너무 좁군요. 재능이라면 우리 나라 영화인들도 못지 않다는 생각이 발딱 고개를 드니 말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무슨 까닭일까요? 신비롭고도, 어떤 면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6609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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