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연의 스타이야기]아름다운 프랑스 여인, 소피 마르소

  • 입력 2000년 9월 28일 19시 01분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뜻밖에도 단호했다. "사적인 것에 대해선 절대 말하지 않겠어요."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의 '심상치 않은' 관계에 대해 묻는 질문에 소피 마르소가 내놓은 답변이다.

<피델리티> 홍보차 내한한 소피 마르소와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은 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왔지만 최근엔 별거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구식 사고방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별거중인 남자와 또 다시 영화를 찍었다는 것도 그렇고, 일의 연장이긴 하지만 그 남자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온 것도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우린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다"고 말하며 성급히 화제를 돌렸다.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의 사이에서 아들 빈센트(5)를 낳은 그녀는 35세의 중년답지 않게 여전히 예뻤다. 아이를 낳느라 몇 천 개의 뼈마디가 늘어났다 제 자리를 찾은 흔적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 무심한 듯 그러나 우주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일 만한 눈빛으로 뭇 남성들을 홀렸던 그녀는 세월의 더께만큼 원숙미도 키운 듯했다.

좀더 여유로워졌으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는 법도 알게 됐다. CF 촬영, 프랑스 문화 대사, 출연작 홍보 등을 이유로 네 차례나 한국을 방문한 그녀는 그때마다 기자들의 사적인 질문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배우의 사생활을 왜 캐내려 하냐"고 쏘아붙이듯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에둘러 말하는 법을 알게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신작 <피델리티>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제가 연기한 클레리아는 젊고 자유로운 여자예요. 난 모든 인간이 클레리아처럼 단 하나의 색으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두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죠. 전 그녀를 충분히 믿고 이해해요."

그녀의 신작 <피델리티>는 굳게 맹세한 부부간의 정절(Fidelity)을 단숨에 배신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결혼한 지 한참 된 부부가, 그것도 원만하지 않은 결혼의 권태기 즈음에 함께 '정절'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과연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짐작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적인 것을 밝히길 꺼려하는 소피의 성향 때문에 궁금증은 잠재울 수밖에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의 설명대로 <피델리티>의 클레리아가 소피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결코 사춘기 남자애들이 열망하는 순진한 환상 속에 갇혀있지 않았으며, 나이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변화시킬 줄 알았다.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나기

1966년 11월17일 운전기사 아버지와 백화점 홍보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피 마르소는 13세 때 7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라붐>에 출연한 후 세계적인 청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아직 수줍은 10대였던 그녀에겐 사춘기 남녀의 고민을 담은 청춘 영화의 프로포즈가 이어졌지만, 그녀는 청초하게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를 거역하고 영화 속에서 과감히 변신을 시도했다. 소피의 변신을 도와준 건 물론 지금의 남편인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이다.

줄랍스키는 그녀가 <라붐> 이후 찍었던 <폴 사강>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17살 짜리 꼬마 여배우에게서 무한한 재능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소피 마르소의 격정>부터 시작된 소피와 줄랍스키와의 인연은 공적으론 네 작품을 함께 만든 끈끈한 감독과 배우 콤비로, 사적으론 한 명의 아들을 둔 남편과 부인 사이로 이어졌다. 이것은 25세의 나이 차를 극복한 독특한 만남이었다.

줄랍스키 감독과의 만남 이후 소피의 삶도 많이 변했다. 소피는 동시대의 청춘스타였던 브룩 실즈나 피비 케이츠처럼 '예쁜 인형'에 만족하지 않고, 격정적인 영상 안에 철학적인 담론을 담아내는 안드레이 줄랍스키 영화의 도발적인 캐릭터로 분위기를 바꿔나갔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더 아름답다><쇼팽의 푸른 노트> 등은 결코 대중적인 영화가 아니었기에 "소피가 슬럼프를 맞았다"라는 평이 난무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전 좀더 풍부해지고 싶었어요. 귀여운 얼굴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지성미로 사랑을 받고 싶었죠. 이때 줄랍스키 감독을 만났고, 그와의 작업을 통해 내 바람이 이루어졌어요."

프랑스제 예쁜 인형이 되길 거부한 소피 마르소에 대해 <피델리티>의 클레베 역을 맡은 배우 파스칼 그레고리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명성 속에서 살아가는 보기 드문 배우"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거짓말쟁이 여자>라는 소설을 출간한 여류 소설가이며, 자연보호 운동가, 동물애호가, 프랑스 문화 친선 대사 등으로 활동하는 '지성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녀는 내한 기자회견에서 "오락영화엔 별 관심이 없다. 끊임없이 질문을 만드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소모적인 영화에 대한 혐오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 할리우드 강풍에도 굽히지 않은 지성미

그런 그녀가 간간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얼굴을 비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아이러니다. <브레이브 하트>부터 시작된 할리우드 영화 외출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비난 섞인 질문에 대해 그녀는 할 말이 많다. "글쎄...미국 영화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죠. 사실 전 몇몇 프랑스 영화에 대해 많은 반감을 갖고 있어요. 지루하거든요. 프랑스 영화의 문제는 아무도 그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들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요."

오래 전부터 "30세쯤 되면 안나 카레니라 같은 역할을 맡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는 결국 소원대로 할리우드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를 연기했고, 셰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한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미모의 백작 부인을. <007 언리미티드>에서 매력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했다.

그러나 우연히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가 모두 할리우드 작품이었을 뿐이지 그녀가 프랑스 영화를 완전히 내팽개쳤던 건 아니다. 그녀는 좀더 새롭고 신선한 영화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배우로서 가장 끔찍한 것은 내 연기가 너무 상투적이거나 진실성이 결여된다고 느껴질 때예요. 그래서 전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늘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좀더 자유롭기를 원하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사춘기적 유치한 고민에 빠져있지 않다. 음모와 모략이 떡고물처럼 버무려진 할리우드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사랑스런 아들 빈센트의 엄마 역할도 똑 소리나게 해내고 있다.

그녀도 언젠간 세월의 굳은살을 숨기지 못할 나이가 되겠지만, 소피는 이런 지적에 대해 "어느 날 할머니로 나타나서 당신을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고 농담조로 웃어넘길 뿐이다. 그런 여유로움이 그녀의 현재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그녀는 향수처럼 쉽게 휘발되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비해 쌓일수록 깊어지는 정신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소피 마르소에겐 그런 '정신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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