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미, 마이셀프&아이린'

  • 입력 2000년 9월 14일 18시 46분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즈음이라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7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시상식에서 말썽많은 백인 래퍼 에미넴이 ‘The Real Slim Shady’로 최우수상을 받은 건 대중문화의 현 주소와 관련해 눈여겨 볼 만하다.

하드코어 힙합의 새 영웅인 에미넴의 앨범은 욕설과 동성애 혐오, 범죄 찬양으로 일관해 사방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힙합 앨범은 역사상 가장 빠른 판매고를 올렸고 미국의 10대는 그를 열렬히 지지한다. 국내에 방송되지 못한 그의 뮤직비디오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동성애자 커플을 조롱하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뚱뚱한 여자가 주문한 음식에 침을 뱉어 내주는 등 역겹고 공격적인 묘사가 태반이다.

외설과 공격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대중문화의 어떤 경향은 상영중인 영화 ‘미, 마이셀프 & 아이린’에서도 발견된다. 패럴리 형제 감독의 전매특허라 할 지저분한 농담은 이 영화에서 한층 더 심해졌다.

사실 코미디가 늘 ‘고급’일 필요는 없다.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코미디 배우인 찰리 채플린도 그의 시대에서는 저급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또 배설과 성은 만국 공통의 코미디 소재가 아니던가. 사적 공간에서 키득거리던 ‘음담패설’을 대형 스크린으로 접하는 경험은 좀 황당하지만, 웃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미, 마이셀프∼’를 보며 웃다가도 색소결핍증 환자에 대한 조롱같은, 약자를 공격하는 장면에 이르면 당황스러워진다. 대개는 색소결핍으로 낯빛이 이상한 사람을 보더라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타이르기 마련 아닌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 찰리의 분열된 자아인 행크는 깔깔대며 “어이, 백짓장!”하고 놀려댄다.

에미넴이 공격적 가사로 스캔들을 낳은 이전 가수들과 다른 것은, 그의 공격 대상이 억압적 권력과 사회가 아니라 성적 소수집단인 동성애자들이라는 점이다. 주목할 점은 이같은 공격이 미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 에미넴의 노래를 방송하지 말라는 동성애자 인권단체의 요구에 MTV는 “우리도 그의 가사에 우려하고 있지만, 관객이 그를 원한다”며 거절했다.

소수에 대한 인권침해가 될 수도 있는 대중문화가 인기를 얻는 현상은 무얼 말해주는 걸까. 이전의 획일화된 사회에서 권력의 억압이 사람들을 짓눌렀다면, 이제 다원화된 사회에선 다양성을 존중하고 살아야 한다는 공존의 도덕률이 새로운 억압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미, 마이셀프∼’에선 착한 찰리보다 공격적이고 도덕적 판단능력이 없는 사악한 행크가 더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행크는 찰리의 ‘착하게 살자’ 주의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남에게 나쁜 짓 하지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짐 뒤에 억눌려 있는, 하지 말라는 규율을 어기고 싶은 충동. 행크와 에미넴은 그 충동의 위험스러운 대변자들이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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