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메일] '애너벨 청 스토리' 이 여자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 입력 2000년 4월 19일 11시 35분


애너벨 청
애너벨 청
우선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그리고 이 글을 읽기 전에, 포르노 여배우 1명이 10시간동안 251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실제 기록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섹스:애너벨 청 스토리'가 엄청나게 야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아니라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이 영화의 심의통과를 놓고 '성(性)영화 심의에 브레이크가 풀렸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 영화의 성적 표현의 수위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요. 성적 표현의 '자극성'만 놓고 본다면 이미 국내에 개봉된 '거짓말'이나 '감각의 제국'보다 못하니까요.

단언컨대, '섹스:애너벨 청 스토리'는 오락을 원한다면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할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애너벨 청의 비상식적인 섹스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관객의 관음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신,'도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설명이 불충분한 구석이 많아 썩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이 영화는 끔찍한 상처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자기파괴로 치닫는 여자에 대한 보고서와도 같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갖게 되는 '1대 251의 섹스'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가 끝날 즈음이면 외면하고 싶을만큼 흉하게 벌어진 상처를 바라봐야 할 때의 고역스런 느낌같은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영화는 포르노 배우 애너벨 청이 싱가포르 중산층 가정에서 잘 자란 아이였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으며 미국 USC대학 여성학 석사라는 점을 줄곧 강조합니다. 그녀가 아주 지적인 학생이었다는 교수의 인터뷰, 그녀가 토론에 참가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머리가 빈' 포르노 배우가 아니다, 그녀의 행동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전략이죠.

하지만 제 생각엔,그녀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일자무식의 포르노배우였다 해도 별 상관이 없었을 것같네요. 애너벨 청은 자신의 행동이 "여성들의 억눌린 성욕이 해방되어야 하며 그 한계를 실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일관된 논리를 제시하지만 논리와 실제 행동 사이의 갭이 너무 큰 탓에 그녀의 주장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이 공허함은 섹스 이벤트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불티나게 팔려도 전혀 돈을 벌지 못한 그녀의 초라한 아파트, "나는 스타"라고 주장하며 포르노 영화 출연료를 올리려고 실랑이를 벌이다 금방 출연료를 깎아주는 그녀의 전화통화 장면을 보면 더해집니다. 애너벨 청은 여성의 성 해방에 앞장선 전사가 아니라 AIDS 감염을 걱정하고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하는 포르노 여배우일 뿐입니다. 그녀가 251명과 마라톤 섹스를 가진뒤 이벤트 주최측이 곧바로 다른 포르노 여배우를 부추겨 그녀의 기록을 깨뜨리는 장면에서도 드러나듯, 그녀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포르노 업계의 자발적인 희생양이었던 거죠.

도대체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을 때 관객은 애너벨 청의 과거와 만나게 됩니다. 포르노 배우가 되기전,런던의 한 지하철 역에서 6명의 남자로부터 윤간을 당한 그녀의 과거사가 드러나게 되지요. 유리조각으로 팔뚝을 그으며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하는 자기학대의 진원지도 아마 이 끔찍한 경험이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퍼포먼스 도중 251번째인 거구의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통증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계속해줘!"를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유리조각으로 팔을 긋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같네요. 그녀의 섹스 퍼포먼스 조차 자기자신을 긍정하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내고 고통앞에서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위악적인 자기기만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이해하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요.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하고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자기파괴의 극단으로 치닫던 클라우디아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경찰관같은 사람을 애너벨 청에게 데려다 주고 싶어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한숨이 나올 정도로 그녀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이 되다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하는 대목은 포르노배우를 그만두고 방황하다 1년 뒤 다시 포르노 업계로 돌아온 애너벨 청이 "더이상 잃어버릴 게 없으니 이젠 자신있게 임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정말 궁금해지는 건, '더이상 잃어버릴 게 없을'만큼 한 여자가 참혹하게 망가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가 뭐 그렇게 돈벌이가 될 거같다고 영화 수입업자는 판권이 2,3만 달러밖에 안되던 이 영화에 1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수입해왔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세상에 나보다 더 처참하게 망가진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위로라도 삼으라는 건가요?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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