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90>

  • 입력 2009년 5월 11일 13시 17분


제 19장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사소한 비밀이나 별 것 아닌 거짓말이 큰 화를 부른다. 치명적인 이별이나 참혹한 불행을 막고 싶은가. 고백하라, 일평생 단 한 번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민선이 허리를 일으키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댔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탁 치기도 했다.

“아버진 당연히 알겠군요. 보트를 움직이면 아마도 아버지께 자동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센서 하나만 달아둬도 되는 간단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음파를 날리진 않았습니다. 첫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보트를 몰고 나갔다가 뒤집힐 때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거든요. 그 사이에 음파를 쏠 장비를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죠. 둘째, 아버진 이 구닥다리 보트를 특별히 아낀답니다. 딸보다 더 사랑하죠. 별장을 높은 가격에 팔라는 문의가 줄을 이었지만 전부 거절했죠. 특별시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중에서 보트를 띄울 곳은 달섬 밖에 없으니까요. 아버진 결코 보트를 향해 음파를 쏘지 못합니다. 장담해요.”

석범이 이야기를 되돌렸다.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적 있습니까?”

“……몇 번 ……유학을 떠날 때도 그랬고.”

“가장 최근에 다툰 건 뭣 때문입니까?”

“그야, 글라슈트 때문이죠. 아버진 내가 글라슈트 팀원인 걸 끔찍이 싫어하거든요. 로봇 근처 얼씬거리지 말고 본업에 충실하라더군요. 웃기는 얘기죠. 열네 살 이후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인간이 아버지랍시고 와서, 자기 식대로 지껄여요. 남이야 로봇과 놀든 말든…….”

“자연인 그룹 소속인가요?”

석범의 물음은 짧고 날카로웠다.

“아버진 평생 어느 단체에 소속된 적이 없어요. 자칭 '완전한 자유주의자'니까요. 하지만 그쪽 생각을 담은 출판사들을 후원하는 건 맞아요. 병원에서 번 돈을 몽땅 거기에 갖다 붙는다고, 아버지랑 사는 여자가 불만이 대단하던 걸요. 스무 살이나 어린 계집애가 아버지랑 붙어먹는 거야, 뻔하죠, 예나 지금이나 돈 때문이니까요. 아악!”

석범이 갑자기 차를 세웠고, 그 바람에 민선의 몸이 크게 출렁거렸다.

“왜 그걸 지금 말하는 겁니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모르겠습니까? 이건 테러예요. 부엉이 빌딩을 내려앉혔고 로봇방송국 <보노보>에서 폭탄을 터트린, 로봇격투기를 혐오하는 자연인 그룹의 테러!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난 그저 글리슈트 팀원일 뿐이에요.”

“부엉이 빌딩 테러도 어쩌면 민선 씨를 노린 짓일지도 모릅니다. 자자,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시작합시다. 민선 씨를 버리고 어린 여자랑 사는 아버지 이름이 뭡니까?”

“……노윤상입니다.”

“노, 윤, 상! 혹시 앵거 클리닉을 운영하는 그 노윤상 원장?”

이름을 딱딱 끊어서 되씹는 석범의 얼굴은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였다.

“맞습니다, 그 사람!”

“민선 씨!”

석범은 소리를 버럭 지른 후 말을 잇지 못했다. 민선은 변명하지 않고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지금으로선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다.

1분이 지났다. 이대로 30초만 더 도로에서 불법정차하면 특별시로 돌아가자마자 체포 격리될 수도 있었다. 석범은 운전대를 쥔 채 화를 누르며 이야기했다.

“이것 보세요. 피살된 변주민 선수가 만나기로 예정한 사람이 노윤상 원장과 서사라 트레이너였다는 내 말 듣지 않았습니까? 한데 왜 그때 노원장이 민선 씨 아버지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겁니까?”

민선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그 작자와 엮이는 것 자체가 싫어서 그랬어요. 은 검사님 입에서 노윤상 앵거 클리닉이 나오는 순간 반갑게 웃으며, 아! 내 아버지를 만나셨군요, 이래야 한다는 거예요? 그 인간은 그 인간이고 나는 나에요.”

“돼먹지 않은 고집 탓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노윤상 원장이 내 아버지다, 이렇게 말하면 나랑 달섬까지 왔겠어요? 수사를 한답시고, 서사라에 관해 묻듯이, 내게 이것저것 묻고 또 묻다가 시간 다 보냈겠죠. 은 검사님이랑 이 밤을 그딴 식으로 쓰긴 싫었어요.”

그딴 식으로 쓰기 싫었다고?

키스의 여파일까. 민선이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석범이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산 구비를 하나 둘 셋 넘었을 때, 앨리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검사님! 무사하십니까? 다치신 덴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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