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2>

  • 입력 2009년 4월 15일 13시 24분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그의 부재가 존재로 바뀌는 상상을 하며 한 스푼 씩 한 스푼 씩 절망을 미루던, 쌉싸름 달콤한 시간.

단단한 성벽의 바위틈들이 모여 한 마리 물총새를 만들었다. 앨리스는 행인의 시선을 피하려고 사라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물총새 성벽을 내게 보여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협박 따윈 없었습니다. 변주민 선수에게 돈을 보낸 건 맞아요. 그들은 잘 먹어야 합니다. 몸이 곧 밑천이니까요. 변 선수는 너무 굶주려서 근육들이 엉망이 되었더군요.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정말 돕고 싶었습니다."

"친구?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속일 생각 마십시오. 격투 로봇 글라슈트 개발을 위해 집까지 팔았더군요. 자신도 알거진데 친구를 돕는단 말입니까? 혹시 두 사람 연인이었습니까?"

사라가 하얀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의 치아도 전부 사고 직후 항균 강화 신물질로 조립된 것이다.

"남 형사님! 잊으셨나요? 변주민 선수가 사랑한 건 달링 4호였어요. 로봇에 매혹된 사람은 결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죠. 이 매혹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아직도 논란거립니다만, 변 선수는 운명이라고 답하더군요. 달링 4호의 사랑은 이 삭사이와망 성벽처럼 단단하고 또 이 물총새처럼 은밀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달링 4호를 향한 변 선수의 사랑은 진실했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두들겨 팹니까? ……좋습니다. 협박이 아니라 치더라도 왜 돈을 빌려 달라고 하던가요? 끼니나 이으라고 자진해서 줬다는 변명은 마십시오. 조사해보니 최근 한 달 안에 이번 말고도 두 차례나 더 돈을 부쳤더군요."

"따져 묻진 않았지만, 달링 4호 때문이겠죠. 변두리 격투가가 감당하기엔 벅찬 가격이었으니까요. 변 선수는 언제나 최상품을 원했어요. 헌데 로봇 파손 및 유기죈지 무슨 희한한 죄 때문에 대회 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내게 손을 벌린 거죠. 마침 바디 바자르 테러 사건의 피해보상비가 들어왔기에, 그에게 줬어요."

"헌데 변주민 선수와는 얼마나 자주 만났습니까?"

"집요하시네. 그냥 곧장 질문하세요. 데이트를 했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데이트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작년 9월부턴 거의 매주 만나긴 했지요. 글라슈트 때문입니다. 붙들고 엉켜 싸우는 기술은 W만으론 부족해서 변주민 선수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덕분에 글라슈트의 시합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졌지요."

사라의 대답엔 허점이 없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감돈 뒤 앨리스가 3층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2층, 1층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 가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만, 부엉이 빌딩 옥탑방에서 어떻게 뛰어내린 겁니까?"

"지겨워. 또 그 질문인가요? 난 처참하게 다쳤는데 노민선 박사는 멀쩡한 이유가 궁금한 거죠?"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는 살아야죠.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아무리 내 몸이 완충 역할을 했어도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부러져야 됩니다만…… 다 자기 복인 거죠. 이제 대답이 되었습니까?"

앨리스는 이 답을 이미 보고서에서 읽었다. 정말 그럴까? 그것뿐일까? 앨리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숨이 가빠서……."

사라가 만류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약속 시간이 지났으니 곧 변 선수가 올 겁니다."

"삭사이와망 성벽, 여기서 변 선수를 만난다고요? 왜 하필 물총새 앞이죠?"

앨리스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엉켜 뒹굴 때는 호흡이 가장 중요해요. 로봇이 무슨 호흡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호흡이란 단순히 숨쉬기가 아니죠. 몸 스스로 밀고 당기는 리듬이라고나 할까요. 산소가 희박한 곳일수록 호흡에 능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분명히 갈린답니다. 아, 이상한 일이네요. 벌써 15분이나 늦었군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성실한 친군데……."

앨리스가 지금까지 당한 일들을 만회하듯 짧게 선언했다.

"변주민 선수는 오지 않을 겁니다. 이틀 전 살해당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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