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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3>5공의 탄압, 그리고 강탈 당한 동아방송

입력 2010-10-04 03:00업데이트 2010-11-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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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검열에 ‘無사설’ 저항… 보안사 지하실서 DBS 뺏겨
검열의 흔적들 계엄당국의 검열로 얼룩진 동아일보 1980년 5월 15일자. 계엄당국이 자신에 비판적인 내용을 제멋대로 잘라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동아연감, 신동아 등의 광고(점선 부분)를 채워 넣어야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검열의 흔적들 계엄당국의 검열로 얼룩진 동아일보 1980년 5월 15일자. 계엄당국이 자신에 비판적인 내용을 제멋대로 잘라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동아연감, 신동아 등의 광고(점선 부분)를 채워 넣어야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폭군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고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폭군이 설 땅이 없다…4·19혁명 스무 돌…자유의 나무가 얼마나 자랐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80년 4월 19일 아침부터 모진 비바람이 역사의 현장, 세종로 네거리를 휘몰아치고 있다.’

4·19혁명 20주년을 맞은 1980년 4월 19일. 동아일보는 이런 내용의 ‘횡설수설’ 칼럼을 실었다. 어렵게 찾아온 ‘서울의 봄’이 신군부의 부상, 3김의 각축, 노사분규와 학생시위의 격화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이른바 ‘안개정국’이었다. 이날 칼럼은 이 같은 정국 상황이 몰고 올 정치 사회적 파란과 격동을 예견하고 있었다.

당시 계엄사령부의 지면 검열은 혹독했다. 신군부는 검열지침을 내세워 뉴스를 멋대로 각색했다. 1980년 4월 17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1980년 5월 10일, 동아일보사의 방송국 출판국 기자들은 ‘진실보도를 막고 진실을 왜곡시키며 국민여론을 오도해 민주화를 지연시켜온 계엄당국의 검열을 단언코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해 검열반대운동의 불꽃을 댕겼다. 이에 고무된 한국기자협회도 5월 16일 ‘검열을 거부한다’는 선언문과 행동지침 등을 채택했다.

이에 동아일보에 대한 계엄당국의 검열은 더욱 혹독해졌다. 1980년 5월 15일의 검열 내용을 보면 △‘한반도 안정에 변함이 없고 북한의 침공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발언 불가(전면 삭제) △부상 또는 파괴 통계는 경찰관이 포함된 숫자는 가능하고 학생 부상만을 부각시키는 내용은 불가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문 불가(전면 삭제) △김대중 씨 시국수습 방안 제시 불가(전면 삭제) 등이었다.

떠나는 동아방송 직원들 정부의 불법적인 언론 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은 1980년 11월 30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종방 다음 날인 12월 1일 눈물을 흘리며 KBS로 떠나는 동아방송 직원들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왼쪽 아래).떠나는 동아방송 직원들 정부의 불법적인 언론 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은 1980년 11월 30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종방 다음 날인 12월 1일 눈물을 흘리며 KBS로 떠나는 동아방송 직원들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왼쪽 아래).
동아일보는 5월 16일 사설을 아예 게재하지 않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맞섰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계엄당국의 통제로 항쟁 기간 내내 보도는 불가능했다. 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23일까지 5일 동안 무사설 저항을 이어나갔다. 검열이 강화된 5월 13일부터 5·18민주화운동이 마무리되는 5월 27일까지 한 컷짜리 만평인 ‘동아희평’은 11일 동안 실리지 못했다. 촌철살인의 대명사였던 네 컷짜리 만화 ‘고바우’ 역시 검열을 피할 방법이 없자 무사설과 보조를 맞춰 8일간 게재하지 않았다. 5월 22일부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가 가능해졌다. 무장폭도, 난동, 폭동으로 표현한 여러 신문과 달리 동아일보는 데모대 시위 소요와 같은 객관적인 어휘를 사용했다.





1980년 7월 새 국면이 전개됐다. 신군부가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온 언론인 숙정을 강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방송·경향신문의 97명 해직, KBS의 140명 해직에 이어 신군부는 8월 들어 자율이라는 미명하에 전국의 모든 언론사에서 대대적인 해직을 강행했다. 해직된 이들은 대부분 검열을 비판하는 제작 거부에 참여했거나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이었다. 당시 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의 실무 집행에 따라 8월 9일 동아일보에서도 해직이 이뤄졌다. 당시 박권상 논설주간, 김진현 논설위원, 최일남 편집부국장, 최맹호 배인준 기자 등 33명이 강제 해직됐다. 2001년 6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이들 가운데 16명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다.

1980년 8월 18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그해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언론인 해직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11월 12일. 정부는 언론기관의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날 오후 5시 20분경 동아일보 본사로 보안사 요원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에게 보안사령관의 면담 요청을 전했다. 김 회장과 이 사장은 그를 따라 보안사령부에 도착했다. 보안사 지하실에서 이 대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수사관이 동아일보사의 동아방송(DBS) 포기를 강요했다. 김 회장과 이 사장은 3시간 반 동안 저항했지만 보안사 지하실의 협박 분위기 속에서 그 이상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동아방송은 결국 11월 30일 고별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도 당국의 지침이 내려왔다. ‘모든 고별 멘트 또는 고별 프로그램의 녹음, 녹화용 대본, 큐시트는 필히 사전에 계엄사의 검열을 받아야 함. 검열 받은 원고, 대본 외에 일체의 애드리브를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1963년 4월 25일 첫 전파를 발사한 동아방송은 빠르고 공정한 보도와 날카로운 논평, 수준 높은 교양프로 등으로 한국 방송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동아일보 취재 데스크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생방송으로 기자들과 함께 뉴스를 전하는 뉴스쇼, 음악전문가가 진행하는 DJ방송, 청취자가 참여하는 토론프로그램 등 새 포맷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이었다.

올해 4월 22일, 동아방송 출신 PD 성우 아나운서 등 방송 관계자 90여 명이 모여 동아방송 창립 47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이 입을 모았다. “동아방송은 젊고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방송이었다. 그 전통이 새로운 방송사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권력의 부당함 질타한 ‘김중배 칼럼’ ▼
비유 상징으로 독자사랑 한몸에 정권 제재로 2년만에 중단


동아일보 1982년 3월 6일자에 실린 김중배 칼럼 ‘그게 이렇지요’의 첫 회. 동아일보 자료 사진동아일보 1982년 3월 6일자에 실린 김중배 칼럼 ‘그게 이렇지요’의 첫 회.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삶의 계가와 생전묘비명을 스스로의 뼈를 깎으며 쌓아가는 권력자는 죽음 뒤의 사랑을 누릴 수 있을게다. 그의 작은 잘못마저 인간적인 체취 속에 덮여지는 後光(후광)의 삶을 누릴 수도 있을게다.’(1984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그게 이렇지요’)

1980년대 제5공화국 치하에서는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 통폐합,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조항이 담긴 언론기본법 등으로 언론이 극도의 제약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김중배 논설위원의 칼럼 ‘그게 이렇지요’를 통해 바른 언론의 길을 제시하고 국민을 외면하는 권력의 부당함을 꼬집었다. 1982년 3월 6일부터 매주 토요일 연재되던 이 칼럼은 독자들의 성원을 받으며 동아일보 간판 칼럼으로 자리 잡았다.

김 논설위원은 주로 부패한 권력과 그로 인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이 같은 잘못을 언론 통제로 감추려는 정권의 행태를 비판했다. ‘天井席(천정석)의 안개’(1983년 6월 4일자)에서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단식을 밝히지 못하는 언론의 상황을 질타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가’(1984년 1월 21일자)에서는 해외 언론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국내 언론만 막는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람을 사람답게’(1982년 12월 11일자)에서는 그리스 희곡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들어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칼럼 ‘그게 이렇지요’에는 그리스 희곡뿐 아니라 소설, 해외 언론 사례, 해외에서의 경험, 역사 속 인물 등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김 논설위원은 훗날 “글자를 흔드는 폭풍은 거세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글자들이 ‘死字(사자)’ 아닌 ‘活字(활자)’로 살아나도록, 비유와 상징 등 우회의 화법을 일삼아 왔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고 밝혔다.

은유적 우회적 표현이었지만 5공의 제재와 간섭을 피해 오래갈 순 없었다. 칼럼은 시작한 지 2년 만인 1984년 2월 25일 ‘미처 못다 부른 노래’란 제목의 글로 끝을 맺었다.

‘오늘 그리고 내일, 누군가는 기필코 바르게 말해야 한다. 어두우므로 도리어 밝은 정론의 횃불을 올려야 한다…나는 믿는다. 오늘, 서산에 저무는 태양은 아주 저물어 버리기 위해서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일, 새롭게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 저물어 간다는 것을 끝내 믿는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 김상만 명예회장 ‘언론자유 금펜賞’ 받아 ▼
광고탄압에도 언론 용기 보여줘… 선정된지 7년만에 1982년 수상

1982년 5월 28일 일민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명예회장(오른쪽)이 프란스 빙크 당시 국제신문발행인협회 회장으로부터 ‘언론자유 금펜상’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1982년 5월 28일 일민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명예회장(오른쪽)이 프란스 빙크 당시 국제신문발행인협회 회장으로부터 ‘언론자유 금펜상’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82년 5월 28일 일민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명예회장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열린 제35차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현 세계신문협회) 총회에서 ‘골든 펜 오브 프리덤 상(언론자유 금펜상)’을 수상했다. 1975년 4월 18일 수상자로 선정된 지 7년 만에 상을 받은 것이다. 시상식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국내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수상이 계속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1975년 국제신문발행인협회는 수상자 선정 이유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1974년 정부의 엄격한 언론통제에 대항해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주저 없이 이를 기사화하고, 편집국에 상주해 온 정보원을 내쫓고 정부에 언론자유를 요구한 한 신문사의 용기 있고 책임 있는 행동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프란스 빙크 당시 국제신문발행인협회 회장이 김 명예회장에게 상을 수여하자 총회에 참석한 세계 신문 발행인 200여 명은 모두 일어서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빙크 회장은 상을 전달하며 “김 명예회장이 7년 전 당시 동아일보 사장 겸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당국의 광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언론자유와 정치자유의 신장을 위해 대담하고 굽히지 않는 자세로 검열에 저항하면서 경제적 보복을 극복해냈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언론자유 금펜상’ 수상이 7년이나 지연된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낼 생각은 없다”며 “중요한 것은 한국 언론의 현재와 장래이며 동아일보가 앞으로도 ‘한국인의 목소리’ 역할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언론자유 금펜상’은 국제신문발행인협회가 매년 언론자유 증진에 현저하게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아시아에서 ‘언론자유 금펜상’을 수상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저명한 언론인인 모흐타르 루비스에 이어 김 명예회장이 두 번째였다.

1982년 9월 2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언론자유 금펜상’ 수상 및 영국 명예기사 작위 수여 기념 축하연에서 김 명예회장은 “(‘언론자유 금펜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인들과 60여 년간 민족을 대변해 온 동아일보에 주어진 인정의 기록이고 격려의 증표”라고 말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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