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 빼앗기’]<1>중국 왜 이러나

  • 입력 2004년 8월 5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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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화(中華) 역사인식의 부활.”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서 1948년 이전의 한국사 기술을 삭제한 데 대한 학계의 경고음이다. 중국은 고구려를 한반도 삼국(三國)의 일부로 기술하라는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행동으로써 한국의 사관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중국의 한반도 역사인식 부정. 그 의도와 목표지점을 시리즈로 진단한다.》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서 1948년 이전의 한국사를 삭제한 데 대해 한국 학계의 반응은 “예상됐던 일”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의 비판은 먼저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학술적 문제’라는 중국 정부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 외교부가 이렇다 할 준비를 못한 데 쏟아진다.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임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는 지적이다.

▽노골화된 ‘동북공정’의 목표지점=고려대 최광식 교수(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는 “외교부는 그동안 고구려사 문제는 학술차원의 문제이니 중국의 사회과학원과 고구려연구재단이 풀어갈 문제라고 미뤄왔지만 중국이 막상 정부 차원에서 포문을 열기 시작하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말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사)는 이번 삭제에 대해 “당장 분쟁의 불씨를 줄이는 제스처이자 한국 길들이기”라고 분석했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 기술부분을 복원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되 문제제기의 소지를 아예 없애 이 문제가 국제사회에 여론화되는 것 자체를 피해가겠다는 전술이라는 지적이다.

갇혀버린 ‘고구려史의 증인’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광개토왕비. 동양 최대의 비석으로 1600년 가까이 고구려의 역사를 증언해 온 이 비석은 현재 “불순한 인사들로부터의 파괴 위협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중국 정부에 의해 방탄유리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최종필 일본 오사카경제법대 교수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인구 구성비로는 전체의 5% 내외지만 영토로는 70%를 차지한다”며 “동북공정은 이러한 소수민족을 관리하기 위한 국가전략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조선족은 55개 소수 민족 중 13번째로 인구가 많은 데다 한반도와 접경지대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신장위구르나 티베트보다도 더 신경을 쓰는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다른 소수민족의 경우 자치주의 장(長)은 해당 민족 출신을 임명하지만 조선족 자치주만은 중국인으로 임명하는 것이 중국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해 갖고 있는 불안감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한국외국어대 여호규 교수는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여론이 악화되면 정부가 이에 밀려서 중국정부에 시정을 요구하는 수순이었다”며 “지금이라도 범정부적 차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에 대응할 논리와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구려, 한반도와의 연결고리 끊기 계속돼=학계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는 중국이 이번 삭제로 일단 미봉적 대응을 한 뒤 고구려와 한반도의 연결고리를 끊는 이론화 작업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일례로 고구려를 중국사로 귀속시키기 위해 이론작업을 벌여온 중국학자들이 봉착했던 최대의 난제는 고구려와 백제를 같은 민족으로 기록한 자국의 역사서였다. 고구려까지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한반도 내부의 백제를 소수민족 정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더 이상 한반도와 연결고리를 갖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는 이론개발에 동북공정 참여 학자들은 총력을 기울여 왔다.

박선영 교수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역사교과서들은 현재 옌볜에 사는 조선족의 기원을 고구려 부여까지 소급해갔다. 이제는 그런 역사기술을 찾을 수 없다. 현존 조선족들은 조선시대에 건너온 이주민족으로 고구려와 아무런 연계성이 없다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신형식 상명대 초빙교수(백산학회 회장)는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뿌리 깊은 교육으로 인해 학자들조차 다른 나라의 연구서는 거들떠도 안 본다”며 “중국 정부와 사안별로 일대일 대응을 펼치는 것은 전략적으로 한국만 손해”라고 말했다.

따라서 중국을 직접 설득하기보다는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일에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고구려사와 관련한 국내 연구서들을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일본어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하루빨리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로 번역된 한국 역사서는 ‘한국사신론’ 등 개설서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고구려사 등 고대사 관련 책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최광식 교수도 “중국과 국경문제로 첨예한 입장에 놓여 있는 러시아 인도 일본, 그리고 원나라를 두고 한국처럼 역사 침탈을 당하고 있는 몽골 등을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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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외교부 “中대사 불러 실망과 유감 표시”▼

중국 외교부가 5일 홈페이지에서 한국의 현대사 이전 부분을 통째로 삭제함에 따라 고구려사 왜곡을 둘러싼 한중간 마찰은 제2라운드에 접어들게 됐다.

중국의 이번 조치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인식의 본질은 바꾸지 않겠지만 한국과의 외교적 마찰 요인은 일단 잘라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는 일단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당국자는 “오늘 리빈 주한 중국대사를 불러 실망과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에 대한 실망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미룬 채 “고구려사는 민족사에서 불가분의 부분으로 양보할 수 없는 만큼 (중국의 왜곡을) 바로잡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조치가 부족한 때문이냐”는 질문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정부가 중국의 조치를 미봉책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번 조치를 문제의 종결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실제로 외교부 안팎에선 중국의 대응이 큰 나라답지 못하다는 반응이 많다. 양국 외교부가 올해 2월 고구려사에 관한 이견을 ‘학술 문제로 해결하자’고 합의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대목을 삭제한 것은 외교관례상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이번 조치를 한국에 통보할 때도 외교적 수사(修辭)로나마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중국 외교부가 주변국의 역사를 고대사부터 설명하던 관행을 깨고, 한국사를 ‘건국 이후’만 설명한 것은 한국 고대사를 통째로 부정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소지가 없지 않다.

다만 중국이 이날 홈페이지에서 일본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을 지운 것은 한국의 입장을 그나마 배려한 조치로 평가할 만하다.

일본이 5세기 초 한반도 남부에 진출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고대사의 실체적 진실을 놓고 양국이 논란을 벌여온 핵심 쟁점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인정치 않는 한국은 그동안 중국 정부에 대해 이에 관한 부분을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지워줄 것을 요구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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