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가정 안의 성차별 "엄만 여자 아닌가요"

입력 2000-02-21 19:42수정 2009-09-23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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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아들)의 돌잔치날, 첫째(딸)가 동생의 옷을 무심코 밟고 지나가자 시어머님이 ‘여자가 남자옷을 밟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를 냈다.”

“친척언니가 세 번째 임신을 했는데 딸이라는 걸 알고 낙태시켰다. 21세기에 아들로 대를 잇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해 5월 전국 4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성차별사례들. 여성들이 가정에서 느끼는 차별사례가 전체 2039건중 550건으로 가장 많았다.

▼ 딸 기죽이기 ▼

정영애씨(42·서울 도봉구 방학동)는 종가의 첫딸인 언니에 이어 8년만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뒤이어 남동생 셋을 낳았고 그는 남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공장에 다녀야 했다.

“아들 딸 차별이라기 보다는 다 그런줄 알았다”는 정씨는 “그래도 행복해요. 이제 꿈에 그리던 고등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다음달 청암주부학교(고교과정)에 입학한다. 40대 주부들로 붐비는 주부학교나 방송통신고교에는 딸이기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1993년 방영된 MBC TV 인기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후남이(김희애 분)는 구박덩어리였다. 엄마는 후남이가 대학에 붙고 쌍둥이 남동생 귀남이(최수종)가 낙방하자 “내가 그럴줄 알았어. 나올 때부터 먼저 나오더니, 귀남이 앞길을 막지”라며 등록금도 주지 않았다.

세 살 위인 오빠가 얌전한 성격이었다는 한울림출판사 곽미순편집장(35)은 부모님이 괄괄한 자신의 기를 죽여야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고 말했다.

“어렸을 땐 왜 나만 오빠의 밥상을 차려줘야 하느냐, 오빠와 똑같이 대우해 달라며 엄마에게 대들곤 했어요. 그런 오빠가 결혼 후 집안일을 거드는 것을 보면 잘됐다 싶으면서도 배신감을 느껴요.”

이같은 집안내 성차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박민준(중3) 민지(초등4) 남매를 둔 이순희씨(42·서울 노원구 상계동)는 “딸애가 배고프다길래 ‘라면 끓여 먹어라’고 했더니 ‘오빠가 배고프다고 했으면 밥해줬을 걸’하더라”며 “아들 딸 똑같이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딸애가 곧잘 ‘오빠한테라면 안그럴텐데’하는 걸 보면 뭔가 다른가 보다”고 말했다.

▼ 딸의 엄마, 아들의 엄마 ▼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후남이를 구박한 것은 왜 같은 여성인 엄마였을까. 대를 잇는 것 못지 않게 아들을 잘 키워 집안을 흥하게 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었기 때문.

학생잡지가 배달됐을 때 본책은 오빠가 먼저 보고 자신은 부록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는 이정민씨(39·서울 양천구 목동)는 “집안에서 12년만에 태어난 아들인 오빠가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듣자 엄마의 집안내 위치가 탄탄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들이 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경우도 적지 않다.

13일 수도여고부설 방송통신고교를 졸업한 이현숙씨(50·송파구 문정동)는 “‘여자가 배워 뭘하냐’는 아빠와 달리 엄마는 ‘네가 조금만 더 우겼으면 학교를 보냈을텐데’라며 안타까와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음달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한다.

이선아씨(34·서울 동작구 흑석동)의 오빠는 대학을 마치고 취업했지만 이씨는 “배우고 싶으면 배우라”며 등록금을 쥐어주는 엄마덕에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는 “큰딸로서 집안일을 도맡아했다는 엄마는 ‘나 일한 것도 서러운데 너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 착한 여자는 없다 ▼

‘엄마는 쌍둥이 남매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산신령의 말에 따라 딸에게는 산성을 쌓게 한 뒤 아들에게는 대나무 옷을 입히고 나막신을 신겨 서울을 갔다오라고 시킨다. 엄마는 딸이 먼저 성을 쌓을까봐…’.

예부터 전해오는 쌍둥이장수남매 이야기도 남아선호사상 내지 ‘유능한 딸 죽이기’의 반증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의 박미라편집장은 “온실속에서 나약하게 키워진 귀남이는 마음이 약하고 혼자 힘으로 서지 못하지만 독립적으로 자라 억척스런 후남이는 성공한다”고 주장했다.

집안내 딸아들 차별은 사회의 성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착한 여자’는 사회에서도 남자들의 뒷전에 서야한다고 강요당한다. 그러나 이정민씨는 딸은 자신처럼 착한 여자로 길들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천상 계집애야’라는 말이 칭찬인 줄 알고 지금껏 남에게 맞춰 살았습니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애는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해요. 나보다 잘 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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