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내 딸은 슈퍼우먼으로…"당당하게 커주렴"

입력 2000-01-17 20:57수정 2009-09-23 07:46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딸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이면 엄마의 눈에는 자신을 닮은, 혹은 자신과 다른 딸의 성향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딸이 엄마를 끝없이 모델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낸시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의 경우 모델링의 대상인 아빠와 단절되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씩씩한 인성을 키워나가는 데 반해 여자아이는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관계지향적 인간지향적 성격을 발달시켜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엄마들은 자신을 닮는 것 외에 ‘딸이 살아갈 세상’에서 필요한 인성이라고 생각하는 당당함 씩씩함 강함을 딸들이 갖기 바란다.

이인숙씨(38·초등학교 교사)의 큰딸 지선이(초등 5)는 엄마를 닮아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이지만 둘째딸 주연이(초등 1)는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세다. 네 살 땐 한겨울에 옷을 안 입겠다고 버텨 속옷 바람으로 바깥에 나간 적도 있었다.

“저를 안 닮아서 그런지 주연이가 자기 주장을 끝까지 펴는 점이 오히려 더 좋아보여요. 맘먹은 것을 꼭 해내고 마는 고집도 필요하니까요.”

혜윤이(초등 2)는 태권도 청띠다. 남자아이들이 치마를 들추고 괴롭히니까 더 이상 당하지 않게끔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선언한 것. 엄마 이명희씨(35·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딸을 강하고 당당한 여자로 키우겠다고 생각했기에 선선히 승낙했다.

“우리 엄마는 그 시대 여느 엄마들처럼 여자란 시집 잘 가 살림 잘하고 애 잘 기르는 게 최고라고 가르쳤어요. 저는 여자의 한계를 지워준 엄마의 틀에 맞춰 살 수 밖에 없었지만 혜윤이에게는 ‘여자라서 못하는 것은 없다’고 얘기해줘요.”

남성중심의 이 사회에서 ‘강한 여자가 오래 살아남는다’고 믿는 여성학자 변혜정씨(36). 자라면서 엄마로부터 ‘무슨 여자애가…’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그는 자신을 강하게 키워준 엄마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딸(7)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중성적인 교육방식’을 택했을 때 먼 훗날 딸이 불평하지 않을까 약간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의 딸을 지닌 엄마들은 대부분 평준화된 교육체제 아래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라 민주화운동이 치열했던 80년대 대학을 다닌 386세대 여성들이다. 조한혜정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는 이들을 “머리로는 이상주의를 천명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중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가정과 직장생활을 조화롭게 양립시키며 주체적 여성의 삶을 살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현장은 이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사회의 문은 여전히 남성과 ‘아름다운 프로’들에게만 열려 있고, 미시족이나 세련된 ‘우리집 CEO’가 되려면 남편의 경제력이 전제돼야 했다.

많은 엄마들이 딸 키우는 전략을 세우는 건 아들 키우는 전략보다 한결 힘들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어떤 여성상이 바람직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강함’과 ‘여성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인데 여성학자들은 이를 두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또다른 ‘슈퍼우먼 꿈꾸기’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9살 5살 딸을 두고 있는 김숙영씨(36·광주 광산구 월계동)는 “딸이 나중에 손에 물묻히지 않는 일을 했으면 싶어 벌써부터 공부에 떠민다”며 “아이를 진정으로 잘 키울 수 있을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요즘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작년부턴가, 아이들과 떠들고 뒹구는 즐거움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됐어요.육아에 힘들어하는 직장여성들의 고통도 익히 보아왔던 터라 그 짐을 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의 황금기를 애들 키우는 데에만 바치고 싶지도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그의 고민은 30대 여성의 정체성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새로 시작하기도 어렵고, 이대로 있기에는 아쉬운, 그러면서도 딸이 살아갈 세상은 자신이 지내온 그것과는 다르기를 원하는….

<윤경은기자> keyoon@donga.com

▼딸 유치원 보내던 날▼

▽내 추억을 일깨우는 싸아한 박하향내. 아버지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그 옛날처럼 딸과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젊은 엄마인 내 모습과 여리디 여린 내 딸의 모습이 한 순간 정지돼 있기를 바라며.(배기성)

▽유난히도 먹는 것을 싫어하는 딸은 또래애들보다 훨씬 작고 말랐다. 맨 뒷줄에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가슴이 벅차 올랐다.(김관례)

▽어느 덧 자라 유치원이란 곳에서 공동생활하는 아이가 됐다는 설렘이 가장 컸어요. 아이도 경쟁사회에 첫발을 내딛는구나 하는 긴장감과 함께 나도 이제 학부모가 되는구나 하는 묘한 서글픔에 눈시울을 적셨어요.(김혜진)

▽소위 시집살이라는 걸 하려니 부모님들이 잘해 주시는데도 소소한 일들로 자주 마음을 다칩니다. 그럴때마다 네 살박이 정민이는 “엄마. 또 가슴이 아파?”하며 걱정스레 제 손을 잡아줍니다. 목메게 행복을 느끼면서 엄마가 그리워집니다.(왕은영)

※보내주신 의견을 다 싣지 못하지만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주 주제인 초경(初經)을 맞은 딸과 엄마의 얘기를 E메일(kjk9@donga.com)로 보내주십시오.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