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車에 의한, 車를 위한 도시

  • 입력 1999년 4월 5일 18시 31분


전국적 규모의 폭력집단이 창궐하고 있다. 이 집단은 기존의 조직폭력배와 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없다. 조직책도 영업부장도 없다. 조직원 모두가 행동대원인 게릴라 집단이다. 기존의 조직폭력배가 서울 강남의 룸살롱을 주무대로 활동하는데 비해 이들은 주로 강남의 보도(步道)를 배경으로 활동한다. 최근에는 전국으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이들은 생선회칼이 아닌 자동차를 휘두른다. 이 집단의 이름은 보도주차파(步道駐車派)라고나 할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도시에서 보도 위에 자동차가 올라서기 시작했다. 차도는 차도고 보도는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자동차는 보도 위에서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엔진소리를 높여 씩씩거리기도 했다. 사람은 보도에서 자동차를 피해 다녀야 했다. 발걸음을 디딜 자리에 육중한 바퀴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으니 보도블록인들 성할 수가 없었다.

도로교통법은 자동차는 보도 위에 주차를 해서도, 정차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교통안전법은 자동차가 보행자를 위협하면 안 된다고 한다. 형법은 도로를 부수거나 교통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한다.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은 자동차가 보도를 침범해서 사고를 내면 무조건 공소 대상이 된다고 한다. 보도주차파는 이 모든 법을 말끔히 무시하는 치외법권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동차에 의한, 자동차를 위한, 자동차의 거리를 우리의 도시에 새기기 시작했다. 그 가장 참담한 모습은 강남에서 드러난다.

건축법은 도시미관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거리, 미관지구를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건물을 지을 때 도로에서 일정한 폭을 후퇴하여 지으라고 요구한다. 건물이 물러난 자리에는 담장도, 계단도, 그리고 ‘주차장’도 만들지 말라고 한다. 강남의 큰길가가 그런 동네였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들은 했다. 건물도 틀림없이 요구대로 후퇴하여 지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주차 구획선이 그어졌다. 우리 은행에 예금하러 오시는 ‘고객전용’ 주차 장은 중요했으나 지나가는 행인의 보도는 무시되었다. 손님은 왕이었고 왕은 법률을 초월하는 대우를 받았다. 보도는 이래저래 차도와 불법주차공간 사이에 끼워지게 되었다.

강남은 화려한 면책특권의 거리.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의 거리. 이렇게 살기 좋은 미관도시가 대한민국 외에 또 있던가.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주차장을 건물 단위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던져 놓은 데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주차장이야말로 집적(集積)의 효율이 요구되는 공간. 도시계획할 때 블록마다 주차장 용지를 별도로 확보할 수는 없었을까. 건물을 짓는 사람들에게 주차예치금도 받고 주차부담금도 받아 공용주차장을 짓는 외국의 예는 왜 무시되었을까.

고장난 자동차는 혼자서도 고친다. 그러나 고장난 거리는 시민들이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

자동차 시트에 앉아서만 도시를 돌아다니겠다는 사고는 버려야 한다. 기어코 건물 문 앞에만 자동차를 세워두려는 사고도 버려야 한다. 굳이 자동차를 이용하려면 공용주차장에 요금을 내고 차를 세우고 한두 블록 걸어다니는 것이 더불어 사는 도시생활이다.

도시를 만드는 이는 공용주차장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의 관리자는 주차미터기도 설치하고 떳떳한 주차를 장려해야 한다. 시민은 보행이 도시생활의 필수요소임을 인정해야 한다. 휘발유가 공짜가 아니듯 대도시에서는 주차도 유료임이 당연히 여겨져야 한다.

우리의 보도는 무법천지에다가 만물상으로 변했다. 올라서 있는 것들이 다양하고도 많다.

지하철 환기구. 홍수가 나면 물이 넘친다고 턱을 높이기까지 했으니 그만큼 보도는 좁아졌다.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지하철 환기구 바람에 날릴 때 그 환기구가 이다지나 높던가. 전봇대를 없애면서 갈 데가 없어진 변압기도 올라섰다.

신문 판매대, 구두수선소도 모두 한자리씩 자리 잡았다. 노점상도 합세했다. 신촌, 청량리, 영등포 같은 부도심의 보도는 여지없이 노점상이 장악하고 있다.

노점은 거리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쉬지 않고 중계해 주면서 ‘길보드차트’를 소개하는 곳이 노점이다. 잠시 멈춰 서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목걸이를 고르는 곳도 노점이다. 그렇게 노점은 거리에 기운을 넣는다.

고서(古書)나 중고 레코드판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상품은 보이지 않고 순대, 떡볶이, 오징어만 넘쳐난다는 점은 아쉬워도 그런 건 그냥 덮어두자.

노점상이 생존의 영역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규칙도 있다. 시민이 버스를 탈 공간은 보도 위에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의 버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선다. 예측할 수 없는 곳에 정차하는 버스를 시민들은 각자 알아서 타야 한다. 비까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노점의 협곡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바로 저기 있는 고지를 향해 할아버지 할머니도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노점에서 튀김과 맛탕을 드시는 손님의 자리가 중요한 만큼 버스를 기다리는 행인이 서 있을 자리도 존중되어야 한다. 노점상의 바퀴도 그 자리에서는 비켜서야 한다.

보행인이 장애물 경주를 해야 하는 거리, 사냥감처럼 자동차에 쫓겨다녀야 하는 거리,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들만 살아남는 거리는 아름답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 있듯이 무작정 걷고만 싶은 거리도 있다.

걷기 좋은 거리는 보기에도 아름답다. 그런 거리를 늘려나가는 것은 우리 시대의 책임이다.

이제 자동차는 보도에서 떠나라.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는 것은 폭력배의 대표적 속성이 아니던가. 자동차가 보도로 올라서는 이유는 차도를 달리는 다른 자동차가 두렵기 때문이다.

힘없는 보행인들이 폭력배를 몰아내는 길은 단결밖에 없다. ‘만국의 뚜벅이’여, 단결하라. 폭력배들은 문신도 필요하다. 기꺼이 새겨 주라. ‘보도 위 주차금지!’ 라고.

서현 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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