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구 칼럼]고소할 때는 언제고?

  • 입력 1998년 11월 20일 19시 27분


열하루 전 청와대에서는 여야 총재회담이 있었다. 그리고 엿새 뒤 3당 3역회의가 열렸다. 소모적인 대결정치를 그만두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성숙한 정치, 생산적인 정치를 복원하자는 총재회담의 합의에 따라 그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야 3당의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들이 모처럼 한자리에서 만나는 그 첫회의 첫의제가 엉뚱하게도 6·4지방선거 고소고발사건 일괄취하 문제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 정치와 정치인의 현주소를 희화적으로 보여주는 부끄러운 장면이다.

▼ 訴취하가 첫 의제라니

벌써 잊고들 있지만 지난 6월 지방선거는 대단히 ‘추잡한 선거’로 낙인찍혀 있다. IMF관리체제라는 국난의 시기에, 그것도 지방자치 일꾼을 뽑는 지역행사에 초장부터 여야 당수뇌부가 총출동해 전국의 선거현장을 누비며 치고받은 중앙정치의 난무는 가관이었다.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상호비방과 인신공격, 근거가 불분명한 폭로와 흑색선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언동이 판을 쳤고 이는 곧 무차별 고소고발과 맞고소 맞고발로 이어졌다. 극도의 정치혐오와 냉소 무관심을 증폭시킨 결과가 바로 38년만의 최저 투표율(52.6%)로 나타났다.

상대 후보진영의 불법 탈법이 눈에 띄면 법에 호소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고약한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상대를 음해하거나 악용 남용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수틀리면 무작정 고소고발을 하고, 상대가 그렇게 나오면 이쪽에서도 무조건 맞고소 맞고발을 해놓고 보자는 작태다. 6·4지방선거의 경우 검찰에 입건된 전체 선거사범 4천3백37명 가운데 1천6백58명은 이런 무차별 고소고발전으로 자동입건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여야 당지도부와 대변인 등 주요 당직자들이 망라돼 있다.

뒤늦게나마 이성 잃었던 처사들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 소취하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다. 그동안 찜찜하고 부담스러웠던 사안을 차제에 도매금으로 끼워넣어 홀가분하게 털어버리자는 데 서로 의기투합한 게 아니냐는 인상이 짙다. 안팎으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정치인들의 고작 한다는 수작과 발상이 이 모양이라면 참으로 한심하다. 그들을 믿고 고통을 감내하는 국민이 불쌍할 따름이다.

▼ 말만 무성한 정치개혁

생각해 보자.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정치가 달라진 것이 무언가. 누가 뭐래도 고통분담을 호소하며 국난극복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그럼에도 여야가 만났다 하면 서로 물고뜯고 삿대질하며 소모적 정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정치개혁만 해도 모든 개혁에 우선한다면서도 아직 말로만 무성할 뿐 구체적인 작업에는 착수조차 못하고 있다. 국민의 80%가 IMF위기극복의 최대 걸림돌로 정치인을 꼽았다는 여론조사결과도 있다.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있는가.

동네사람들의 골목싸움이라면 또 모른다. 화해하고 소취하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 일꾼을 뽑는 국가적 행사에서 벌어진 범법행위에 관한 사안이다. 차원이 다르다. 고소고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켕긴다고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당치않은 소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법을 만드는 사람들로서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우롱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법에 건 이상 엄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법대로 처리토록 해야 한다. 음해하고 무고하는 못된 풍토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있다.

▼ 법대로 시비 가려야

물론 여야가 선거과정에서 서로 얼굴 붉혔던 일을 뉘우치고 앙금을 씻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여야의 화해분위기 조성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들여다 보이는 일괄 소취하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닥치는대로 고소고발전을 벌여도 언젠가는 정치적 흥정으로 면죄부를 받게 된다는 나쁜 선례를 끊지않으면 다음번 선거는 보나마나다. 마음놓고 불법탈법을 저지르고 고소고발이 기승을 부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잖아도 나라에 할 일이 태산같은데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이 이렇게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자기 앞가림부터 하려든다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닌가. 제발 일의 선후를 분간하기 바란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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