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6년 4월 21일 03시 0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영국과 독일에선 10대 이상 격추해야 에이스로 불렸다.
1차 대전 때 ‘에이스 중의 에이스’는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었다. 귀족 가문의 리히트호펜은 80대를 격추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붉은색으로 칠한 전투기를 몰고 창공을 날던 그는 ‘붉은 남작’ ‘붉은 악마’로 불렸다.
기병대로 출발한 그는 정찰기를 타본 뒤 공중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비행대로 옮겨 매주 1대를 격추하는 무서운 격추 레이스를 시작했다. 금발의 미남이었던 그는 독일의 우상이 됐고 여성들은 사인을 받으려고 아우성이었다.
1918년 4월 21일 리히트호펜은 포커 전투기를 몰고 솜 강 부근 상공으로 출격했다. 그는 캐나다 공군의 캐멀 전투기 한 대를 발견하고 적진 깊숙이 맹추격했다가 돌연 나타난 다른 캐멀기에 거꾸로 추격을 당하는 상황에 몰렸다.
리히트호펜이 추격을 눈치 채고 기수를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 한 방이 기체를 뚫고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리히트호펜은 들판에 비상 착륙했다. 기체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적군이었던 연합군 병사들이 점검하러 갔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붉은 남작을 죽인 303구경 총알은 어디서 날아왔을까. 오늘날까지 이론이 분분하다.
303구경 탄은 대영제국 산하 모든 군의 기관총에 두루 사용되던 것이었다. 리히트호펜을 추격하던 캐멀기가 그를 잡았다느니, 지상의 대공 기관총 작품이었다느니 주장이 엇갈렸다.
후세 전문가들은 총탄이 그의 가슴을 뒤편 아래쪽에서 대각선으로 관통했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어쨌거나 그는 적군이었던 연합군 병사들의 추도 속에 베르탕글이라는 작은 마을에 안장됐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하늘에서 그를 만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서 포로로 잡혔다면 악수라도 한번 해 봤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종전 7년 후 1925년 리히트호펜의 유해는 독일로 돌아왔다. 전국에 조기가 게양됐고 운구 행렬 뒤로는 베를린이 생긴 이래 가장 긴 줄이 만들어졌다. 그가 베를린 군인묘지에 묻힐 때 첫 삽을 뜬 사람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