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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0월 12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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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후. 여객기 앞에서 갑자기 불꽃이 타올랐다. 놀란 납치범들이 조종석으로 몰려드는 사이 서독 특공대는 비행기 뒤로 잠입했다. 승객 87명의 목숨을 담보로 적군파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했던 테러리스트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적군파에게는 1년 전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작전’에 당한 데 이은 실패였다. 또한 숱한 인질극을 통해 협상을 벌여온 서독 정부와의 팽팽한 기싸움이 급격히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70년대 적군파와 서독 정부의 대결은 ‘야만’ 그 자체였다.
좌파 도시게릴라를 표방한 적군파는 동독의 지원 하에 미군시설에 대한 폭탄테러, 기업인과 관료의 납치를 자행했다.
정부는 체포된 적군파 요원에 대한 무자비한 응징으로 대응했다. 적군파 창시자인 여성 칼럼니스트 울리케 마인호프는 사방이 흰색으로 칠해진 독방에 감금되는 ‘백색 고문’을 당한 끝에 목을 맸다. 옥중 단식투쟁을 한 홀거 마인스는 튜브를 통해 강제로 주입된 음식물에 목이 막혀 죽었다.
적군파는 동료를 단죄한 연방검사를 사살해 보복했다. 그리고 경영자협회 회장 슐레이만을 납치하고 여객기를 점거해 동료들의 석방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정부는 강공을 택했다. 모가디슈 진압작전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적군파의 우두머리인 안드레아스 바더는 감방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사인을 밝힐 수 없게 시체는 훼손됐다. 당연히 인질 슐레이만도 다음날 시체로 발견됐다.
나치 잔재 청산과 반(反)자본주의를 내세운 적군파는 베트남전쟁을 ‘미국의 더러운 전쟁’이라고 비난하면서 공감을 얻어 나갔다. 그러나 계속되는 테러에 대중은 등을 돌렸다. 분단체제하의 ‘이념 과잉’은 낭만으로 시작했으나 광기(狂氣)로 끝났다.
1998년 발표한 ‘해체 선언문’에서 적군파는 “무장투쟁은 권위적 사회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좌파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노력은 비현실적이었다”고 자아 비판했다.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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